극장에서 볼 영화를 고를 때 신중한 편이다. 단순히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영화 약속을 잡지도 않는다.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같이 보러갈 사람이 생각나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다.
이건 봐야지, 점 찍어둔 영화들이 차례로 개봉해서 극장엘 다녀왔다. 오랜만에 바깥을 나서니 기분전환도 되고, 좋은 기운이 충전된 것 같았다.
1.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매기스 플랜>을 보고 그레타 거윅에 입덕해서 그가 감독한 <레이디 버드>를 봤다. 한동안 그가 만든 세계에 흠뻑 빠졌던 나는 <작은 아씨들>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원작에 대한 기억이 너무 희미해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작은 아씨들 편을 들었다. 워낙 유명한 고전이지만 총 4권의 완역본을 접할 기회가 적어서,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작은 아씨들의 내용은 1, 2권까지의 내용이라고 한다.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시간을 역순행적으로 배치하여 흥미로운 결말을 강조한다. 그레타 거윅은 모두가 알고 있는 '작은 아씨들'에 대한 결말을 아주 재치있게 뒤집어 놓았다. 그 덕분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는 행복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설 수 있었다.
<레이디 버드>도 그렇지만 대사가 현실감이 넘친다. 말많은 자매들끼리 투닥거리는 신에서는 각자의 캐릭터가 너무 생생하게 다가왔다.
무도회에서 예쁜 옷을 입고 춤추던 메그가 결혼 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모습은 너무 짠했고, 에이미가 똑부러지게 결혼에 대한 소신을 얘기하는 장면에선 가슴이 미어졌다. 가장 마음이 따스한 베스가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을 땐 눈물이 절로 났다.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조'였는데, 조의 말괄량이 같은 성격은 사고뭉치 '레이디 버드'를 닮기도 했지만 사랑과 열정이 가득한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처음부터 널 사랑했어. 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매력쟁이 조에게 누가 안 반하겠냐만은. 로리는 조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사랑했다고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이 장면에서 강아지 같은 로리의 처연한 눈빛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조는 여성이 죽거나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글을 써서 돈을 벌기를 원한다. 시대에 맞지 않는 소설이라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꿈을 향해 당차게 뛰어 나가는 조도 물론 멋졌지만.
나는 조가 베스의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성토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여자도 감정뿐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어요.
외모뿐 아니라 야심과 재능도 있고요.
여자는 사랑이 전부라는 말을 듣는 것도 질렸어요.
너무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너무 외로워요.
그레타 거윅은 '너무 외롭다'는 대사를 추가하면서 자신도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시얼샤 로넌이 연기하는 장면에서 그레타 거윅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인터뷰 원문은 https://www.filmcomment.com/article/lifes-work/ 참고)
아직도 여성은 싸워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사회다. 때론 그게 너무 서럽고, 외로워서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인가. <작은 아씨들>은 그런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준다. 당신만 그런게 아니라고.
2. 기억의 전쟁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텀블벅 후원을 했는데, 무료 예매권이 생겨서 훌쩍 보고 왔다.
처음 이 사건을 알게 되었을 땐 정말 충격적이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직접적인 가해자가 한국군임이 자명한 이 일을 우리는 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았을까.
피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당연히 책임과 사과를 요구하면서, 우리가 가해한 역사에 대해 아무런 책임과 사과도 없이 뻔뻔하게 살아가는 현재가 너무 모순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 5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살아있는 증거이자 고통받는 현재의 퐁니 퐁넛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극화되지 않은 날것의 증언들을 보고 들으며 전쟁의 잔혹함을 몸으로 느꼈다.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마을 사람들은 가족들을 잃고도 그 사실에 대해 함구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억의 의미로서 제사를 지내는 것 뿐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지슬>이 많이 생각났고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주전장>도 생각났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은 오랫동안 신뢰받지 못했고, 고통받는 몸을 눈 앞에 두고도 일본군에 의한 강제 성노예라는 역사적 사실을 거부당해 왔다.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여성의 관점에서 진술하는 일은 언제나 (전쟁 당사자인) 남성에 의해 쉽게 왜곡되고 거부당한다.
응우옌티탄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당연히 사과를 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군은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다'는 피켓을 들고 생존자를 공격하는 시위를 열었다.
예상치 못한 진실 공방을 맞닥뜨린 응우예티탄은 시민평화법정(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법정의 형태를 갖춘 토론회)에 나와 증언을 한다.
이곳에 많은 시민들이 모였는데, 호평중 학생들이 응우예티탄에게 편지와 선물을 전해주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갚을 순 없잖아?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의 뼈아픈 말이다.
젊은 세대는 오히려 가해자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정작 당사자는 해결의 의지가 없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면 좋을까.
기억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3. 메기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인데 놓쳐버려서 아쉬워하고 있다가 마침 아트나인에서 다시 상영한다는 소식에 보러 갔다.
의심의 구덩이에 빠져버린 나, 어떻게 해야할까요?
병원에서 벌어진 엑스레이 몰카(불법촬영) 사건을 시작으로 영화에 나온 사람들은 믿음의 딜레마를 한 차례씩 겪는다.
도시에 돌연 나타난 커다란 씽크홀처럼 의심의 구덩이는 점점 깊어져서. '몰카에 찍힌 대상이 나 아닐까?' '병원 사람들은 다 꾀병이 아닐까' '저 친구는 내 반지를 훔친게 아닐까' '내 남자친구는 전 여친을 때렸을까' 와 같은 갖가지 주제들을 고민하게 된다.
이 사람들을 관찰하는 1인칭 화자가 바로 메기. 병원 수조에 갇힌 메기다. (참고로 메기의 목소리는 천우희 배우가 맡았다.)
메기는 주인공 여윤영을 관찰하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는데. 여윤영은 '일단 믿고 시작해요'라고 이경진 원장에게 제안을 하지만, 정작 자신이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남친이 전여친과의 관계에서 데이트 폭력을 저질렀었다면?' 이라는 의심은 자신의 일상을 180도로 바꾸게 되는 전환점이 된다.
나라면 아마 갈팡질팡하다가 조용히 헤어짐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끝까지 성원의 속내를 알 수 없었을 때에는 성원의 그 따뜻하고 다정했던 마음들을 더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너도 오해를 부풀리고 있다면 바늘로 찔러주고 싶다. 안 아프게
부풀려진 의심을 아프지 않게 바늘로 터뜨려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마지막까지 나는 애처롭게 해명하는 성원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확실한 대답 앞에서 거대한 싱크홀은 심판자처럼 그를 삼켰고, 그는 끝내 구제되지 못한 단 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전여친을 때렸다는 그의 말에 변명을 이어 들을 필요가 없다. 구질구질해질 게 뻔하다. 그 결정적 계기가 없었다면 아마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는 상황이 눈에 선해서. 어떤 게 비극인가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다.
<곡성>을 볼 땐 선과 악이 결정되어 있고, 주인공이 의심을 했다는 이유로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참 가련했는데. 이 영화는 믿음에 대한 영화지만 <곡성>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한 발만 디디면 낭떠러지인 씽크홀(구덩이) 앞에선 무엇을 믿고 의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시험대에 올리지 않고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것이 그저 현명한 일이다.
이 영화에서 처음 만난 구교환 배우와 이주영 배우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코미디 장르의 독립영화라 설레고 기대했는데, 매력적인 배우들을 알게 되어 더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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