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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는 즐거워/영화

그녀(her)

 

주변에서 영화에 대한 얘기를 너무 많이 듣다 보면, 마치 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영화가 있다. <그녀>가 그랬다. 

지난 여름 우연히 들여다 본 책에서 영화 <그녀>의 배경으로 '스지텐차오' 육교가 나온단 사실을 알았다. 나홀로 상하이 여행을 앞두고 문득 그 사실에 이끌려 <그녀>를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배경이 상하이란 사실을 알고 보지 않았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며 봤을 정도로 짧은 장면들이 나온다. 결국 여행은 못 가게 되었지만, 만약 스지텐차오 육교를 갔었다면 혼자 외로움에 취해서 걷는 테오도르의 기분을 제대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 사랑이 끝나면 무엇이 남지

영화의 줄거리는 테오도르가 OS(개인에게 맞춤형으로 제작된 인공지능 시스템?)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단순한 내용이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신선하고 독특하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존 말코비치 되기> 때도 그랬지만 영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 상황에 완전하게 몰입하도록 만드는 재주가 뛰어난 것 같다.

이혼으로 인해 깊은 상실감을 겪고있던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단순한 비서나 심심풀이 폰섹스 상대와는 달랐다. 초기 세팅단계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선택하자 어머니와의 관계를 섬세하게 물어봐 준다거나 '너는 상실의 경험이 없잖아'라는 테오도르의 말에 상처도 받는다. 둘은 점점 각별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고 테오도르는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인간에게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감정'이나 '자유의지'가 실제로 그녀에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며, 게다가 그녀는 육체를 소유하지 않은 OS이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한 소통과 학습이 가능하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인공지능이 많은 것을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지금의 시대인데, 과연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OS가 상업적으로 개발되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상상은 꽤 설득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인공지능과도 사랑할 수 있다'를 보여준다기 보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자신만의 유일하고도 특별한 연인이 되어주길 바랐지만 사만다는 OS로서 급속도로 성장을 겪으면서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직감한다. 둘은 결국 이별을 맞게 되고,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나는 대체 무엇을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던 걸까'하는 질문이 차오른다. 사만다가 떠난 후 혼자 남은 테오도르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건 뭐, 흔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되어버린게 아닌가. 엄청난 반전도 아니라서 더 절절한 외로움만 남았던 것 같다.

- 연기 천재들의 향연, 그리고 호아킨 피닉스의 말

주인공인 호아킨 피닉스를 제외하고도 나오는 주연 배우들이 참 화려하다.

노래도 잘하고 목소리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여성임이 철철 묻어나는 스칼렛 요한슨이며, <캐롤>에선 단발여신 여기서는 긴머리 여신인 루니 마라도 잠깐 잠깐 나온다. 

에이미 아담스는 얼굴이 익숙해서 누구였더라 했는데, <컨택트>와 <아메리칸 허슬>에서 봤었단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다. 이 영화에서는 옆집 친구 정도의 친숙한 역할인데, 가까운 친구가 이렇게 귀여우면 반칙 아닌가 싶었다.(테오도르 주변엔 왜 이리도 미인이 많은 것인가.)

최근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하지만 난 아직 조커 못봤지ㅋㅋ) 화려한 별들의 잔치 속에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인종, 젠더, 환경 이슈에 대한 소신을 담은 수상 소감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는 진심을 담아 '사랑'과 '연민'의 중요성을 호소하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형 리버 피닉스의 말로 끝을 맺는다.

Run to the rescue with love and peace will follow.
"구원을 향해 달려가. 사랑과 평화가 뒤따라올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