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이사를 핑계로 부산에 내려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혼자 영화관에 갔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관에 발길을 끊은 탓인지 상영작들은 죄다 재개봉 혹은 리마스터링 작품들이었다.
영화 시작 전 낯익은 작품들이 많아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보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얼른 극장에 달려가 봤던 게 당연했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좋은 것들은 좋았고,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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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웰>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짧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아콰피나 주연의 신작이다.
룰루 왕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로,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계 이민자 가족에 관한 영화다.
뉴욕에 사는 '빌리'는 중국에 사는 할머니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어느 날 할머니가 병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촌의 결혼 모임을 빙자하여 온 가족이 할머니 곁으로 모이게 되는데, 할머니의 행복한 여생을 위해 가족들은 그에게 병을 알리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빌리의 생각은 달랐다.
난 빌리처럼 미국에서 자라진 않았지만, 할머니의 병 상태가 위중하다는 걸 알았을 때 물론 가슴 아프지만, 할머니가 응당 아셔야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가족들이 모두 반대를 하니. 빌리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며 복잡한 감정을 느끼던 빌리는 할머니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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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스토리는 아니지만 소소한 콩트같은 장면들이 재밌었고, 빌리의 감정에 이입되어서 뭉클하기도 했다.
결혼식 술 게임 장면이나 광장무를 배우는 장면도 재밌었고(기합을 하!!), 안마 받으러 갔다가 온등이 부항자국으로 도배되는 장면도 현웃 터졌다.
한국인으로서 너무 공감되는 장면도 많았다. 중국의 가족문화는 어쩜 한국과 이리도 닮았는지.
하지만 결혼식 문화는 좀 다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볼 때도 느꼈지만, 말도 안되게 마을 잔치스러운 화려한 결혼식이라니. 충격적인 스케일이다.
웃긴 장면이 대부분이었지만, 빌리가 엄마한테 미국에 가지 않고 할머니와 있겠다고 떼쓰는 장면에선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빌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가족들은 빌리에게 할아버지의 상태를 알려주지 않았다. 빌리는 어려서 이별하는 법도 몰랐고, 어른들의 배려 아닌 배려로 인해 유년 시절의 그 기억들을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할머닐 아끼고 사랑하지만, 손녀인 빌리에겐 그 어떤 선택지도 주어지지 못했다.
솟구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할 만큼 할머니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존중 받지 못한다는 슬픔이 너무 공감됐다.
어른들은 가끔 서른 된 자식이 아직도 여섯살배기 아이인것 처럼 대한다. 가족들끼리 있을땐 더 내 존재가 가볍고 작은 것 같다.
빌리는 그런 어른들의 지나치게 감상적인 태도에 당당하게 맞선다.
어떤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할머니의 말은 오래 산 사람이 켜켜이 쌓아올린 따스함이 서려있다. 그래서 고맙고 더 기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나도 늦기전에 내 할머니 손을 꼭 잡아줘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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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콰피나의 얼굴, 표정, 목소리가 극의 감정선을 집중력있게 끌고 간다.(어설픈 중국어에도 불구하고) 아콰피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웃픈 스토리를 어떻게 전달하겠나. 아콰피나의 팬이 되어버렸다.
프로필을 검색하니 그녀는 88년생이었다. 나는 당연 나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언니라니.(충격)
한동안 아콰피나의 랩과 노래에 빠져 살았다. 아콰피나는 래퍼로 데뷔해서 현재는 연기 활동도 폭넓게 하고 있다.
'동양인 여성'하면 섹슈얼한 코드로 통하는 미국에서 자기만의 캐릭터와 음악으로 승부한다는 모토가 멋졌다. 게다가 직접 쓰는 랩 가사는 얼마나 신랄하고 웃긴지 모른다.
my vag 가사 너무 웃기다. 찰떡같은 비유, 센스가 넘치는 가사다.
The green tea는 우연히 뮤비를 봤다가 꽂혀서 한동안 열심히 돌려봤다. 이런 B급 코드 너무 사랑하니까요.
페어웰의 빌리라는 캐릭터보다 아콰피나 본인이 훨씬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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