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링은 말했다.
나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사람이다.
나도 샤오거처럼 기억을 잃은 채로 살아갈 때가 있었다. 틈없이 질주하는 일상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어떤 기억들은 감추거나 소거되었다.
과거의 흔적들은 어떤 순간들을 헤집고 나타나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해주었다. 과거와 유리된 삶이 파편화될 수록 온전한 나로 살았던 때가 그리웠다.
권에 있을 때가 좋았다. 따뜻하게 연결된 공동체가 좋았다.
매일매일이 힘들어도 즐거웠다. 농활이 그랬고, 투쟁이 그랬다.
폭력은 싫었다. 가까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다치는 게 너무 싫었다. 먹고 사는 게 항상 문제였다.
나는 갑자기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방향을 잃은 채로 열심히 살았다.
돈을 벌고 그토록 바라던 독립도 어느 정도 했지만, 점점 위태롭게 영위되던 내 삶의 깨진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의 우리는
내일의 우리와 만난다
<우리는 매일매일>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과거와 현재를 고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강유가람 감독의 강렬한 내레이션을 시작으로 그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소개된다. 다들 제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지만 하나의 연결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가 페미니즘이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던 것처럼 이 작품은 한국 여성들이 어떻게 가부장제와 맞서 치열하게 싸워왔는지 그 역사들을 되짚으면서도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을 함께 생각하게 되는 부분들이 좋았다.
90년대 대학가 곳곳에서 터져나오던 여성의 목소리와 마땅히 존재하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간주되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물결이 되기까지 이들의 삶을 닳게 하는 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오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도 스쳐 지나는 장면에서 배경처럼 나와서 깜짝 놀랐고, 나도 기억을 거슬러 자연스럽게 옛생각에 잠겼다.
전사처럼 함께 싸우고 깨지던 사람들이 살아남아서 내일을 꾸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지.
여전히 싸울 것이 많은 세상이다.
남은 날도 더 잘 버텨봐야지. 친구들과 함께.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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