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짧았던 2주 간의 여름 방학에 드라마 <나기의 휴식>을 보며 마음을 돌봤다.
이 드라마는 이로운 점이 너무 많아서 그 자체로 힐링, 휴식이 됐다. 원작 만화도 시간이 나면 챙겨봐야겠다.
<중쇄를 찍자!>에서 인상 깊은 연기로 기억에 남았던 배우 쿠로키 하루가 뽀글머리의 주인공 '나기'를 맡았다.(이제 이 배우는 내 안에서 완전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함^^)
'나기'는 늘 주변의 눈치만 보고 억눌려 살다가 어느 날 과호흡으로 쓰러진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도시를 훌쩍 떠나게 된다.
과호흡의 발단이 된 전남친 '신지'는 헤어진 마당에 집요하게 찾아와 나기를 괴롭히며, 신비하고 요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옆집 뮤지션 '곤짱'은 나기와 썸을 타기도 한다.
남주들이 다 하나같이 못난이들(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라서 초반엔 좀 답답하기도 했는데, 나기가 새로운 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쌓으면서 조금씩 세상에 맞서는 힘을 얻어가는 성장과정이 흥미진진하다.
공기는 마시고 뱉는 거예요.
일본어에는 '공기를 읽는다(空気を読む)'는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여기서 공기는 '분위기', '상황'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니까 공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눈치가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거나 무리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나기는 매사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남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기 바쁘다.
직장에서는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엄마의 무리한 금전 요구에도 어쩌지 못하고 수긍하며, 남자 친구의 취향에 맞추어 뽀글머리를 숨긴 채 내내 연애 관계를 유지했다.
나기는 어느새 깨닫는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제대로 숨 쉴 여유를 찾기 위해 나기는 봇짐하나만 챙긴 채 훌쩍 길을 떠나게 된다.
누구나 휴식(おい とま)이 필요해
그러나 모든 걸 다 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퇴사하고 진짜 내 인생을 살거야'라는 맘을 품어 본 사람들은 누구나 나기와 같은 탈출을 꿈꾸지만, 현실의 족쇄는 참 벗어나기 어렵고 무거운 것이다.
결국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거나 자신이 도피한 문제를 다시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마니까 말이다.
나기 역시 가벼운 짐으로 나선 길이었지만 순탄치 못한 여정을 겪는다.
전남친 신지도 나기 앞에선 늘 자신만만하고 센 척했지만, 자신도 가족의 시선과 사회적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반짝거리고 새로운 것들은 결국 색이 바래는 법이고, 소중한 걸 잃고나면 그것이 소중했단 사실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나기가 숱한 어려움을 헤치고 다시 새로운 길로 나설 수 있게 된 건, 그 선택을 하기까지 자신을 되돌아 봤기 때문이다.
인생의 틈새에서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은 이토록 소중하다. 누구나 휴식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흥미진진한 캐릭터들
나기를 놓고 애정 갈등을 벌이는 전남친 '신지'와 현남친 '곤'은 대비되는 캐릭터다.
신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갑게밖에 못하는 한심한 놈이며(그러고는 맨날 질질 짬), 곤은 여자한테 상냥하게 대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바람둥이이다.(심지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자각도 없음)
폭력적인 전남친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기는 당연히 곤짱에게 이끌리지만 어느새 곤의 친절은 껍데기만 존재할 뿐, 속은 텅 비었단 사실을 알아차린다.
훗날 나기를 통해 두 사람도 조금 성장하게 되지만, 원체 캐릭터가 둘 다 너무 한심하고 못나서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특히 신지와의 러브라인 결사반대)
이 드라마는 애정 소재 외에도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캐릭터 서사를 통해 여성의 삶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동전을 줍고 다니는 윗집 할머니,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며 건설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라라의 엄마, 고학력자지만 백수인 친구 사카모토, 줏대 없는 미인으로 불리며 직장에서 소외받는 이치카와 등등 정말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특히 이들의 삶을 스치듯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후반에 신지의 비중이 많아져서 좀 아쉽긴 했지만, '어쩌다 사람이 저리 됐을까'하는 관심을 두고 지켜보다 보면 그 과정도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사람에 대한 애정, 연민이 조금씩 싹트면서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던 일상이 환기되었다.
나도 나기처럼 공기가 맛있는 순간들과 휴식의 틈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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