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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대로 쓰기/보여주는 일기

살이 뭐길래

나는 일할 때 배고픔이 끼는 걸 싫어한다. 집중해야 할 과제가 있을 때 집중을 깨는 과정이 싫어서 굶기도 한다. 

하루 이틀은 그렇게 일을 할 수 있는데, 일주일, 한 달, 1년은 지속하기 힘들다. 

그렇게 몸이 축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임용고시 공부할 땐 스트레스랑 규칙적이지 못한 식사습관이 엉켜서 더 몸이 안 좋아졌었다. 한 번은 생리통과 겹쳐서 지하철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 그 공포스런 기억은 정말 다시 되살리고 싶지 않다.

배고픔이 무서워진 것이 그 때부터였을까. 배고프면 손이 떨리고, 영양이 충분히 섭취되지 않았다는 신호가 오면 강박적으로 먹을 것을 찾았다. 아픔에 대해서도 더 예민해졌다. 특히 피를 보면 두려움에 세상이 도는 느낌이었고, 조금만 아파도 약을 찾았다. 너무 아파서 견디기 힘들었다기 보다는 그 고통이 영원히 멎지 않을 것 같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병원을 찾으면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스트레스'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규칙적으로 자고 먹고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그것은 늘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를 보면서도 공감한 거지만, 개인의 노오력으로 사회적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출퇴근을 하면서 나의 수면 패턴은 꽤 정상 궤도로 돌아온 편이지만 여전히 나는 업무과중에 시달렸다. 무리해서 일을 끝마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나는 종종 퇴근하고서도 집에 일을 가져오곤 했다.(일 더 한다고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일을 끝마쳐도 그게 끝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퇴근 시간(=하던 일에서 손 떼는 시간)은 조금 빨라졌지만, 여전히 평일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좀비 상태가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좀비 상태에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도 귀찮다. 등록한 헬스장에 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작년 상반기에는 그래도 운동을 꽤 열심히 했다. PT등록을 하고 큰 돈을 들여서 기본적인 운동법을 배웠고, 나름의 보람도 있었다. 그러다 발을 다친 이후로는 헬스장에 발길을 뚝 끊었는데, 이유는 꼭 부상때문만은 아녔다.

나는 운동을 꾸준히 하면 내가 더 건강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고통의 과정이 더 길었다. 짧은 근육통, 긴 근육통, 쏟아지는 잠을 참고 가는 헬스장 등등 그 과정은 누적된 피로와 겹쳐서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PT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역꾸역 헬스장에 나갔는데, 운동을 마치고 칭찬을 들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달라진 내 외모에 대한 평가도 그랬다. 오히려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어서 자꾸만 피하고 숨고 싶어졌다.

먹고 싶은 것을 죄책감 없이 마음껏 먹지 못하는 상황이 늘 버거웠고, 열심히 운동한 만큼 살이 안 빠지는 것도 속상했다.

이 굴레 속에서는 평생 행복해질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을 때 운동을 그만 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은 것을 더 자유롭게 먹었다. 그랬더니 금세 행복해졌다.

애초에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시작한 운동이 아니었던가. 운동을 통해 내 삶의 스트레스가 가중된다고 느꼈다면, 운동을 하지 않는 게 방법일 수 있겠다.

이 기적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결과 나는 운동으로 살을 빼기 전보다 훨씬 높은 무게의 살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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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내 몸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하루이틀이 아니었지만, 나는 필요 이상의 적의를 느껴버렸다. 이번엔 서운함이나 섭섭함이 아니라, 분노가 치밀었다.

분명 나는 뭐하고 있었냐는 말에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낮잠을 잤다는 얘길 했고. 엄마는 그 이야기에 불같이 화를 냈다. 나의 게으른 정신과 살찐 몸이 나쁘다고 했다.  

나는 화가 치미는 순간 전화를 확 끊어버렸는데, 다시 건 전화에서 엄마는 눈치없게 자기 말을 계속했다.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쉬지도 않고 잽을 날리는 엄마에게,

나는 기분이 나쁘다고 단호하게 말하려던 것이 감정이 폭발하면서 소리를 냅다 질러버렸다. 

"내가 엄마 살 찌는 거에 대해서 함부로 말한 적 있어?"

"엄마는 내가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고통받으면 좋겠어?"

"이런 얘기할 거면 다시는 전화하지마."

엄마와 똑같은 방식으로 미친듯이 화를 냈고, 전화도 막 끊었다.

문자로 엄마는 금방 사과했지만, 화는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 게 내 잘못이 아닌데, 죄다 나한테 뒤집어 씌우려는 심산인가 싶었다.

엄마의 불행을 먹고 자란 나는 스트레스로 살이 더 찌겠다고. 그토록 바라는 날씬하고 예쁜 딸이 아니라서 죄송하다고. 말을 해버릴까 하다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엄마는 스스로 행복해지세요. 나한테 스트레스 줄 생각 하지 말고" 라는 말을 보내는 데에 그쳤다.

동생에게 보여줬더니, 내가 단단히 화가 난 느낌이라고 했지만. 자식과 자신을 분리할 줄 모르는 엄마에게 저 정도의 단호한 처방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엄마에게 상처주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늘 이런식으로 의도와 행동이 빗겨나간다.

살이 뭐길래, 대체 뭐길래 우리는 이렇게 진창이 되도록 싸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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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몰랐다.

내가 주5일 저녁 12시까지 고된 노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걸. 재택근무 이후에도 여전히 점심 먹을 시간 없이 바쁘게 일한다는 걸.

내가 알려준 적이 없으니 몰랐던 게 당연하다. 

걱정이 많은 엄마를 더 걱정시켜 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힘들 때 가족에게 기대는 법이 없었다.

같이 살 때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착취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엄마의 사랑이 고맙고 버거울 때가 많았지만, 그 사랑에는 거리두기가 필요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아도 나와 다른 상대를 기꺼이 이해해주는 것 말이다. 

같이 살지 않게 되어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됐다. 엄마를 미워하는 일이 결국 나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끔찍하게 괴롭히고 있는 걸까.

이와중에 집에 먹을 것이 똑 떨어졌다. 엄마의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