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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대로 쓰기/2024 중국생활

겨울 방학 IN 부산

한국에 온 지 어언 11일째, 무엇을 했나

중국에서 한국으로 도망 온 지 벌써 10일이 넘었다.

사실 부산에 오자마자 김포행 비행기를 타서 춘천 장례식 갔다가 다시 친구집이 있는 고양시로 가는 길고긴 여정을 하루 만에 해치웠기 때문에 방바닥에 누워 쉬기만 해도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부산에서 출산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고 유모차를 탈 수 있게된 신생아와 백화점 나들이도 했다. 낯을 가린다던 아기가 예쁜 이모를 봐서 그런지 전혀 경기를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칭얼대다가도 빵떡 과자만 주면 차르르 웃는 아기가 신기했다.(역시 예쁜 이모가 좋은 게야)

학교 일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매일 조금씩 세특을 쓰는데도 힘이 들어서 결국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역시 이렇게 남겨둘 것이 아니라 미리 다 해놓고 도망 왔어야 했다!라는 후회만 잔뜩 생겼다.

철 지난 러브레터를 읽듯이 아이들이 1년 동안 애쓴 흔적들을 보고 웃다가 나 혼자 아쉬운 마음과 걱정을 랩으로 뱉다가 아이구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써야지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내가 생각해도 왜 이러는지 의문) 

올해는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꾸역꾸역 과거의 업보를 청산중이다.

일하러 놀러 매일 가는 핸커

내일은 갑자기 베트남 여행을 간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오늘이 아이슬란드 출발일이었는데 여행 못 가는 슬픔이 한이 되어버리기 전에 후다닥 패키지여행을 신청해 버렸다.

물론 같이 가는 건 방학메이트 쀼다. 이미 매일같이 만나고 있지만 장소를 바꿔서 놀면 더 재미질지도 몰라. 여행 계획 짜기도 귀찮고 힘이 없고, 적당히 휴양이 필요하니 베트남 나트랑&달랏으로 장소를 정했다. 

친구들이랑 다 같이 갔던 필리핀이 내 첫 동남아 여행이었고, 베트남은 또 처음이라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별 기대 없이 떠나는 여행이라 무사히 다녀오는 것만으로 족할 것 같긴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한국에 오면 영화를 잔뜩 봐야지 결심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극장에선 한 편의 영화만 봤다.(알고 보니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들은 이미 상영이 끝났거나, 2월에 개봉예정이었던 것)

그래도 <괴물>이 아직 상영 중이었다는 것은 천만다행으로, 서면 상상마당까지 가서 심야 영화로 봤다. 보고 나서 여운이 너무 깊어서 한동안 내내 울적한 기분이었다.(아래부턴 스포니까 주의) 

어른들의 이야기도 폐부를 찌르는 대사나 '헉'하는 장면들이 몇몇 있었지만, 역시 아이들의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나이는 그런 것 같다.  부모가 나를 어떤 식으로 사랑하는지도 알고, 거기에 적당히 응해주기 위해서 부모 앞에서 어떤 것을 감춰야 하는지도 아는 나이. 그래서 계속 틈새가 벌어지고, 부모 손끝에서 한없이 멀어져 갈 수밖에 없는 나이.

폐기차 안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방치된 채로 노는 장면은 그래서 참 예뻤다. 아무도 그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는 온전한 세계 같아서.

벌어진 이야기의 틈 사이로 불쑥불쑥 미나토의 얼굴을 볼 때면 이상하게 찔렸다. 혐오로 가득 찬 세계가 그 아이의 어떤 부분을 감추게 했는지 너무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반에 "나는 아빠처럼 될 수 없어"라는 대사와 "나는 불쌍하지 않아"라는 대사가 나왔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아이는 이미 엄마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영원히 그 프레임에 갇혀 살 순 없으니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타는 건물을 보며 누가 어떻게 괴물을 만드는가에 대한 진상을 상기시키는 것 같지만, 마지막 장면 하나로 분위기가 딱 바뀐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맑은 하늘 아래에서 자유롭게 풀숲을 헤치며 뛰어가는 아이들은 "새로 태어났을까?" "아니.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을 한다. 

요리의 해맑은 목소리에 잠깐 안심했다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유작 'Aqua'가 흐르고, 햇볕에 말라가던 마음이 또 한 번 눈물에 퐁당 젖는다.

 <어느 가족> 때도 그랬지만, 계속 기억 속을 맴도는 장면들과 대사들로 가득한 영화여서 다시 보지 않아도 계속 다시 보는 기분일 것 같다.

내가 한국에 없는 2월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내한한다고 한다. 또 한번 기회를 놓치겠다만, <괴물>을 극장에서 봤으니 그런대로 소원 풀이는 한 셈이다. 

012

어제까진 계속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산에서 행복했던 시간들을 곱씹어 본다.

북유럽은 못 갔지만, 그래도 제법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이제 다시 중국으로 갈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니 더 그렇다.

남은 방학은 후회 없이 더 잘 쉬다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