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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대로 쓰기/중국 격리일기

중국 무석(우시) 2차 격리 12일차

3월 9일의 비극

격리중이고 재외국민 투표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력하고 심통한 기분이었다. 

그저 혐오를 프로파간다로 내세운 후보가 이기지 않기를 소박하게 바랄 뿐이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출근날 '선생님은 누구 찍었어요?'라는 편가르기성 질문을 받았을 테다. 마스크로 곤란한 표정 정도는 가릴 수 있겠지만, "너네가 내 기분을 짐작이나 하겠니" 싶은 마음으로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을 테다.

하지만 여기는 중국. 게다가 격리 중이니 그런 것을 물어오는 사람도 나눌 사람도 곁에 없어서 슬픈 기분으로 분을 삭였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안부를 물으려고 연락을 하니, 친구가 확진이 됐단 소식을 들었다.

지난 주에는 동생이 확진 되어서 격리 호텔로 들어가게 됐는데(남매가 쌍으로 해외에서 격리 된 상황. 하지만 격리는 나보다 먼저 끝남) 연달아 이런 소식을 들으니 더 침울해졌다.  

갑자기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럽게 느껴졌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내가 작고 초라해졌다.

 

두통을 해결하는 법

이틀 전부터 커피 원두가 똑 떨어졌다.

인스턴트 커피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건 나에게 커피가 아니라서(!) 그걸로 연명하긴 무리가 있었다.  

두통이 시작됐다. 두통의 원인이 카페인 부족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아마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카페인과 설탕이 함유된 홍차나 콜라 같은 것이 가끔 식사와 함께 제공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반복되는 격리 식사 패턴이 지겨워서 식욕도 점차 줄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기 싫어서 한참을 바라본 적도 있다. 

두통을 줄이기 위해 도피성 낮잠을 많이 잤다. 잠깐 개운해졌다가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어제는 타오바오에서 원두를 잔뜩 시켜 놓고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PMS도 잘 넘겼는데 이것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겠지.

나에게 남은 비상 식량과 물 그리고 휴지

 

4주 격리의 마침표

우시에도 꽃 피는 봄이 왔다. 실화냐.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고 있다.

견디기 힘든 날도 있었고, 오늘은 좀 괜찮네 싶은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안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태 보낸 시간 중 가장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격리 해제일이다.  

오늘 창밖을 보니 꽃이 피었다. 싹이 움트는 것도 몰랐는데, 바깥은 봄이 왔구나. 

4주라는 시간 동안 한 계절이 갔고 이 좁은 호텔 방 안에서 나는 용케 많은 일들을 해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든 살아남기 위해 적응을 한다. 하지만 '호텔 한 달 살기'와 '호텔 한 달 격리'는 다르다.

만반의 준비와 각오를 해서 그런지 초반은 나름 버틸 만했던 것 같은데, 3주차에 돌입하면서부터 체력도 많이 나빠졌다. 

누군가가 내 삶을 꾹 눌러서 입체가 아닌 평면에 가둔 것 같았다. 이만큼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다시 이제 입체의 삶으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한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이곳에 왔는데, 소망에 비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격리'가 내 인생에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내 손 안의 작은 자유들을 맘껏 누리며 살고 싶다. 

너와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네
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름다운 것들을 같이 볼 수 있다면 좋겠네
작은 자유가 너의 손안에 있기를
작은 자유가 너와 나의 손안에 있기를

-오지은, '작은 자유'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