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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대로 쓰기/아주 솔직한 교단일기

망종(芒種) 전에 베어야 할 것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이 있다. 망종까지 보리를 모두 베어야 논에 벼도 심고 밭갈이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망종을 넘기면 보리가 바람에 쓰러지는 수가 많으니 이를 경계하는 뜻도 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망종 [芒種] (한국세시풍속사전)

- 지난 주말 내내 체한 상태였다. 열도 끓고, 뭘 먹지도 못하고 3일을 지냈다.

관리자가 교직원 회의에서 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관리자 입김이 센 우리 학교에선 사실 언제고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는데, 학교에 교사만 덩그러니 있어서 그런지 꽤나 냉랭한 분위기가 오래 갔다.

혼자 싸우기엔 역부족이니까, 피해 당사자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었는데 막 나서고는 싶지 않았다. 나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되레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될까봐 먼 발치에서 작은 응원의 메시지만 전했다.

관리자의 사과와 인정으로 그 사람의 화는 금세 풀렸고, 나의 작은 호의로 인해 그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나는 어쩐지 그 사실이 조금 불편하게 여겨졌다. 

 

- 나는 학교에서 전교조 조합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숨기고 산다. 학교 밖에서는 가끔 드러내놓고서 긍지를 가질 때도 있지만, 조합원 수가 적은 우리 학교에서는 낙인이나 꼬리표가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전교조가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두렵다기 보다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든 '전교조'라는 이름으로 읽히고 싶지 않았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 '나는 안전합니다'라는 보호색을 입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정쩡한 위치를 가지고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에겐 스트레스였는데. 갑작스럽게 커밍아웃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지회 집행부 사업으로 지역의 모든 중등 신규 교사에게 우리 지회를 홍보하는 홍보물을 뿌리기로 했다. 고민은 오래했지만,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스승의 날을 기점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보냅시다로 결론이 났다.

방법이나 목적 모두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걸 '내가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장 우리 학교의 신규 선생님들에게 내가 전교조인 걸 알려야 한다니. 심장이 콩닥거리고 두려워서 전날 잠을 못 이뤘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겨우 메시지를 보냈고, 메시지를 줘서 감사하다는 몇몇의 반응과 반가운 후배로부터의 연락도 받았다. 예상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건만, 나는 아직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이고 영 마음에 걸린다.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을 각오로 화살을 쏜 느낌이었달까. 차라리 거꾸로 비난의 화살을 받는 쪽이었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 어떤 따스한 말도 그날의 긴장감을 풀어주지 못했고 결국 점심도 못 먹고 급체로 조퇴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커밍아웃을 하는 일은 이런 기분이구나. 나는 남에게 인정받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월요일이 되자 병은 멀끔히 나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5월 중순이고 등교 개학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때다 싶어 일들이 휘몰아쳐 오기 시작하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힘을 다 소진해버려서 벌써 지친 것 같다.

잘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었던 일도 지금은 다 뒷전으로 두고 쉬고 싶은데 그런 여유가 사치스럽게 느껴지고. 일을 벌려놓고서 하기 싫다고 미루는 내 자신이 무책임한 것 같아 자괴감이 밀려오는 중이다.

나의 이 괴로움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되짚어 보면  오는 기회를 거절하지 못하고 대책없이 나중으로 미뤄뒀던 <과거의 나>를 탓하고 싶어진다.

그 당시 미래였던 현재의 나는 과연 이 위기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 관계의 벽을 요즘 느낀다. 새롭게 맺은 모든 관계들이 안정적인데, 그 '다음'이 없다는 느낌이다.

상대에게 상처를 받을까봐, 혹은 내가 실망할까봐 지레 겁먹고 뒤로 물러서는 경향이 있는 나는 그 벽을 넘기가 참 힘이 든다. 

상처투성이가 된들, 매력적인 사람이라면 덤벼볼 법도 한데 이젠 그 용기마저도 조금씩 사그라 들고 있다. 내가 놓친 기회들을 그저 미련스럽게 바라볼 뿐.

나는 아직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다가오면 경계부터 하고, 내 친절이 오해를 살까 두렵다. 

나도 마음껏 매력을 흘리고 다니고 싶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생각이 많아져 요즘은 드라마도 잘 못 본다. 일상이 새로운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무리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서 오래 갈 수 있을까. 걱정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