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났다.
작년 여름에 비해 일단 길어서 좋았다.
특별히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고, 작게나마 세워둔 목표(면허나 따자)마저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빈둥대며 시간을 보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니 왠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역전할머니 맥주에서 염통꼬치, 반건조 오징어를 시켜서 새벽에 혼술한 것.
엄마랑 영화 <밀정 1930>을 보며 떠들던 것. 엄마랑 마라샹궈 먹은 것.
여름에 계곡을 간 것. 역시 엄마의 추천대로 탁월한 선택이었고.
을숙도에서 노을을 본 것.
거제도에서 요트 타기. 바다를 가르는 요트에서 와인 한 잔. 아침 땡볕에 바다를 보며 산책하기.
야밤까지 멈출 줄 몰랐던 롱바케. 김탁후의 입에서 방학이 끝났다는 말을 듣는 건 가슴 아팠지만.
여전히 맛있는 오사카 고로케. 언제까지 여길 갈 수 있을까. 없어지면 너무 서운할거야.
시원한 카페에서 블로그 리뷰를 쓰다가 해진몬이랑 술 먹을 계획 짤 때.
톤보의 소고기도 참 맛있었지. 해진몬이 언니라면 비밀을 알려줄 수 있다 했을 때. 많이 기뻤다. 걱정했던 마음도 좀 놓였고.
난 집순이가 아니었나봐. 집이 아닌 곳에서 제일 행복하게 지낸 걸 보면.
-
혼자가 되자마자 극심한 우울감이 찾아왔다. 백신 탓인지 모르겠지만 며칠을 잠만 내리잤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개학이 왔다.
일을 하기 시작하니 몸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지만, 매일 산책을 하며 나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요즘 <장미없는 꽃집>도 다시 보고 있고. <롱 베케이션>도 봤고. 옛날 일드 감성에 흠뻑 빠져있다.
물론 두 작품도 시간 차가 상당한데(2008년작/1996년작) 그냥 '옛날'이라고 퉁쳐버리는 이유는 지금은 없는 정서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요즘 일드는 유치해서 진짜 괜찮은 각본이나 연출이 아니고서야, 에이 입맛만 배렸어 이런 느낌이다. 그래서 이미 검증된 작품들만 골라 보게 된다.
물론 옛날에도 유치한 건 있었고(고쿠센 유치해서 다시 못 보는 새럼) 별로인 드라마도 많았지만. 그 시절 특유의 정서나 분위기가 있어서 그게 바로 작품으로 그려지는 게 좋았다. 물론 잘 만든 작품 한정이다.
확실히 영화보다 드라마는 시대성을 더 담고 있어서 색이 바래는 정도가 심하다. 그래도 그 때만 유효한 감성이 있어서, 그걸 꺼내어 보기 위해 다시 보고 싶어진다.
일드는 아니지만 때마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히려 옛날 감성을 흉내낸 요즘 드라마를 보는 건 시간 낭비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제대로 표현한 작품들이 그래서 더 좋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고 그 때의 감성은 언제나 유효하니까.
-
코로나 덕분에 집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실컷보는 사치를 누리게 됐다.
구독왕이 되어서 이것저것 드라마 리스트를 스캔하고 조금만 기다리면 금세 보고싶은 작품이 잘 번역되어 올라온다. 참 좋은 세상이다.
세상엔 재미난 게 넘쳐나고 나는 그런 것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걸 오래 즐기기 위해 나는 오래 살고 싶을 정도다.(목표는 백살)
넷플에 올라온 심월과 왕허디의 따끈따끈한 신작을 해치우고서, WeTV에서 <도묘필기지 운정천궁>을 봤다. 도묘2를 본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마침 타이밍 좋게 방영하니 신나는 기분이었지만, 중반까지 진도가 너무 안 나가서 힘들었다.
이래저래 끝내긴 했지만 <종극필기>를 다시 보고싶다는 열망이 점점 커졌다.
체리마호 재탕과 <아,희환니>를 보기 위해 왓챠를 결제하고, 깔짝대던 <우상연습생>을 이어보기 위해 아이치이 VIP 이용권을 끊었다.
개학 전날까지 우상연습생 막화를 달리며 기운을 충전했다. 'Ei Ei'는 정말 명곡이다.
-
우상연습생을 보며 교육에 대해 생각한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잘 배우는 사람이다. 학습자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불같은 진심도 허공에 떠 있을 뿐이다.
왕자얼과 장이씽의 진심이 연습생에게 전해지는 걸 보는 게 나로서는 감동 포인트였다.(장이씽한테 반해서 노구문을 시작했다 엉엉)
아무렴 시간이 지난 콘텐츠여서(2018년작) 결과를 이미 다 알아도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신경쓰였다. 서바이벌 경쟁프로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출발점에 서 있는것도 아니고 공평한 기회를 나눠갖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패자의 어두운 표정같은 걸 찍을 때 승리에 환호하는 이들이 미워진다. 그런 장면들이 유독 눈에 밟혔다.
진정한 우상(idol)이 되기 위한 성공의 레파토리를 만드는 뻔뻔한 과정을 쉽게 즐기진 못하겠더라.
하지만 마음이 가는 아이들이 제법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농농은 자신이 높은 곳에 올라도 저 밑의 주목받지 못한 이들에게 응원을 전한다. 열심히 잘 했는데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런 예쁜 마음을 들켰을 때조차 귀엽고 어색한 얼굴을 한 농농이 좋다.
요장징은 살쪄서 요장팡이라고 불리는데 계속 '각도' 때문에 그런거라며 변명하는 거 웃기다. 데뷔권에 있는 아이들 중 거의 유일한 보컬 실력자인데, 노래도 잘하고 예쁜 말도 잘한다.
'我懷念的' 무대 끝나고 '이 노래로 우리를 그리워할거야'라는 말을 하는 것도 감동. 노래도 좋아서 계속 듣게 된다.
처음부터 잘하던 쿤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또 잘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쾌감이지만.
원래 잘하는 우등생이 아니라도 자기가 무엇이 모자란지 알고 배우는 사람들은 어디서든 빛을 보인다. 성장 이야기는 역시 이길 수가 없지. (성장캐 사랑하는 사람 나야나)
두서 없이 쓰다가 갑자기 우상연습생 리뷰가 되어버렸구먼.
그래, 여름이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기 > 보여주는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하소연을 들어줘 (0) | 2021.11.05 |
---|---|
사람 풍경 (0) | 2021.10.23 |
결혼은 결말이 아니잖아 (0) | 2021.06.04 |
어버이날을 맞아 불효한 이야기 (0) | 2021.06.04 |
4월 16일 그리고 7주기 (0) | 2021.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