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갑작스러운 제안
일본 여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홋카이도 여행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이어 시작되는 가족 여행을 하기 위해 도쿄로 향했다.
도쿄는 코로나 직전에도 여러 번 갔고, 재작년 단오절에도 갔다 와서 영 흥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도쿄를 가게 된 것은 개상똥 집이 그쪽에 있고, 설 연휴에 도쿄 근교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일본, 중국, 한국에 흩어져 살지만 그리 자주 여행을 다니는 편은 아니다.
코로나 때문에 3년 동안 생이별을 하며 지냈고, 앤데믹 이후에도 각자의 삶이 저마다 바쁘다는 이유로 다 같이 여행 갈 날짜를 잡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으로부터 '설 연휴에 부모님과 함께 일본 온천 여행을 가자'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다.
동생이 가족 여행을, 그것도 자기가 사는 일본으로 초대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심 자기 혼자서는 오랫동안 품어 온 생각이었다고는 하지만 동생이 일본에서 산지 9년 째가 되어서야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었다는 것이 그저 놀랍고 신기했다.
친구들은 이제 걔도 철이 든 게 아니냐? 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글쎄 나는 그렇게 섣부르게 속단하고 싶진 않았다.
이번 여행은 숙소부터 렌터카 예약과 운전까지 동생이 다 도맡아서 하긴 했다.
처음엔 동생이 못 미더웠는데, 나중에는 나도 맘 놓고 온천하고 맛있는 거 먹으며 놀기만 했다.
동생이 의지할 수 있는 여행 메이트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을 계기로 더 신뢰가 생긴 것 같다.
짧은 도쿄 나들이
동생과 약속한 시간 전까지는 혼자 도쿄에서 놀았다.(동생은 스키 타러 간다고 늦게 도쿄에 도착했음)
도쿄는 벌써 네 번째지만, 매번 먹거나 쇼핑하며 돌아다녔지 제대로 도쿄 시내 야경을 본 적이 없었다.
우에노역에 짐을 맡겨두고서, 선샤인시티가 있는 이케부쿠로로 향했다.
선샤인시티는 예전에 방문한 적 있지만, 야경을 보러 선샤인60 전망대에 가는 건 처음이다.
겨울이라 금방 해가 졌고, 통유리 창으로 야경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멀리서 빛나는 탑이 있길래 '저게 도쿄타워구나'하고 한 참을 불이 들어오길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도쿄 타워가 아니라 스카이 트리였다.
도쿄 타워도 보이긴 했지만, 너무 조그맣게 보여서 사진으로는 거의 안 보이는 수준이었다.
야경을 충분히 즐기고 나서는 선샤인 시티 건물에 있는 캐릭터샵들을 구경하고, 출출해져서 근처에 있는 라멘집으로 향했다.
개상이가 알려준 라멘 맛집인 몽고탄멘은 약간 중화풍의 매운 소스를 넣어서 먹는 게 특징이다.
얼큰하고 전혀 느끼하지 않아서 입맛에 맞았던 것 같다.
약속시간이 다가와 다시 우에노 방향으로 가는 길에는 도쿄 시내 구경이나 쇼핑을 더 못해서 아쉽긴 했다.
원래는 다음날 아침 일찍 시내를 나가려 했으나 예상치 못한 숙취의 여파로 잠을 더 자게 되었다.(개상이 먹으라고 사온 와인을 내가 다 마셔서 그렇다)
도쿄 시내랑 개상똥네 집은 꽤 거리가 있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멀리 나가기가 좀 귀찮기도 했다.
뜻밖의 이바라키현 여행
2년 만에 찾은 동생집은 너무 추웠다.(지난번엔 여름에 왔었어서 몰랐던 부분)
바닥이 얼음장이라 발바닥이 따갑고, 히터를 틀면 히터가 닿는 부분만 따뜻했다.
마치 내가 예전에 살던 우시 아파트 같았다. 해가 잘 들어도, 건물자체가 단열이 약해서 바깥보다 안이 더 춥다.
이럴 거면 바깥에서 텐트 치고 자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어떻게 상해, 도쿄 사람들은 이렇게 추운데도 온돌 보일러를 설치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입이 돌아갈 뻔 했지만 그래도 잠은 잤다.
미뤄둔 빨래를 잔뜩하고서, 우체국에 볼 일이 있어 나간다는 동생을 따라갔다.
작은 마을인 히타치 마을에도 메가돈키가 있길래 쇼핑을 좀 하고, 미토로 넘어가서 수산물 시장에서 점심으로 스시를 먹었다.
오전 중에 모든 재료가 소진되는 인기 맛집이어서 서둘러 메뉴판에 있는 것들을 잔뜩 시켰다.
맥주도 한 잔 더 마시고 싶었는데 음료바가 빨리 마감되는 바람에 더 먹지 못한 게 아쉬웠다.
시장을 본격적으로 둘러보러 나왔더니 사람들이 잔뜩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보였다.
생굴을 세척해서 바로 먹을 수 있게 파는 것이었는데, 겨울이지만 혹시나 탈이 날까 봐서 먹지 않았다.
대신 바로 맞은편에 있는 카니미소(게 내장) 집에서 게를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카니미소는 진짜 달고 맛있었다.
주변에 갈 만한 카페를 검색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마침 개상이가 눈 앞에 보이는 다리만 건너면 전망 좋은 아쿠아리움과 카페가 있다며 솔깃한 제안을 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개상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배경지인 '大洗(오오아라이)'라는 곳이었다.
처음에 개상이가 가자고 제안했을 때는 그냥 한적한 어촌마을 풍경이어서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는데, 근처까지 왔으니까 바다 구경할 겸 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세찬 바닷바람을 마시며 다리를 건너자 개상이 말대로 바다뷰 카페가 나왔다.
날씨도 좋고, 풍경을 보면서 마시는 아아도 시원하고 좋았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나가는 길에는 유명한 바다가 보이는 신사가 있어 구경했다.
해가 질 무렵 파도치는 바다와 노을이 마치 그림 같았다.
어쩌다 오타쿠 꾐에 넘어와 애니메이션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저녁은 미토역 근처에서 모츠나베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술을 무한리필로 주문해서 다양한 종류의 술을 먹었는데, 카시스 오렌지랑 니혼슈가 꽤 맛있었다.
술 먹고 개상이랑 신나게 떠들면서 놀다가 히타치마치로 향하는 지하철 타고 집에 왔다.
다음날 아침에 개상이가 난리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지갑과 신분증은 다 있는데, 자기가 애지중지 아끼던 캐릭터 아크릴이 든 가방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분명 아크릴과 모츠나베랑 같이 사진을 찍긴 했으니, 어제 그 술집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오랫동안 모아 온 소중한 굿즈라 전전긍긍했는데, 결국 가게랑 연락이 되어서 가방을 되찾았다.
가방 속 훔쳐갈 물건이 거의 없어서 다행히 도둑맞지는 않았나 보더라.^^
군마현 쿠사츠 온천마을
어무니 아부지가 무사히 나리타 공항에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우리도 나리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공항에 일찍 도착해서 쀼가 주문한 앨범 속 포카와 굿즈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개상똥은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다가 잔뜩 쌓인 쓰레기들을 잘 치워주었다.
일본에서 열심히 내 친구들의 배대지가 되어 주다 보니, 이제 이런 풍경에 익숙해진 듯하다.
아침 겸 점심으로 붓카케 우동을 먹었는데, 면이 쫄깃하고 맛있었다.
한국은 설 연휴가 한창인 때였지만, 일본은 보통의 평일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공항도 한산한 편이고, 렌터카를 빌려서 온천 마을로 향하는 길도 순조로웠다.
이동거리가 꽤 길었지만, 미리 편의점에서 사놓은 간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도쿄는 따뜻했지만, 온천 마을 쪽은 산지여서 춥고 눈이 많이 왔다.
체크인을 하고 바로 저녁 식사를 먹으러 식당으로 가니, 스키야키 정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이것저것 신선한 해물을 잔뜩 먹어서 그런지 음식이 크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저녁에 온천을 즐기고, 다음 날 아침에 나와서 온천 마을을 구경했다.
노보리베츠처럼 여기도 유황 온천이 흘러서 유황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 마을의 전통이기도 한 온천물을 식히는 공연을 관람했다.
아주머니들이 처음엔 노래와 춤을 보여주고, 노 같은 것을 휘저으면서 물을 섞는다.
'죠이나~죠이나~' 이런 조흥구가 흥겨워서 재미있었다.
근처에 신사가 있어서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따끈한 만쥬 하나를 사 먹었다.
나는 거의 일본에 온 이후로 온천 마을만 세 번째 가는 거였는데, 가는 곳마다 특색이 다르고 온천의 질도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야마나시현에서 후지산 구경
가족여행 둘째 날은 야마나시현으로 향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산에서 내려와서 멀리 후지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 특색 음식으로 '호우토우'라는 음식이 유명하다기에 가는 길에 호우토우 체인점에 들렀다.
세 가지 종류의 음식을 시켰는데, 한 냄비에 담겨 나오는 양이 2인분은 족히 되어 보였다.
엄마 아부지 모두 배가 안 고프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일본 음식치고 간이 아주 세지도 않고, 친숙한 입맛이어서 맛있게 잘 먹었다.
차를 타고 달려서 후지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 유명한 계란 튀김이 있어서 맛보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 강풍이 거세게 불더니 비포장 도로에 깔려있던 흙과 모래가 폭풍처럼 날아들었다.
어쩌다 보니 계란 튀김을 사 먹기 위해 뛰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잠시라도 지체하면 흙먼지가 눈코입에 다 들어가게 생겼으니까.
튀김이 좀 짭짤해서 맥주도 같이 시켜 먹긴 했는데, 너무 다급하게 사서 입에 넣다 보니 코로 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날씨는 안 좋았지만, 후지산 기념 샷은 찍고 내려왔다.
포도가 유명한 야마나시 기념관 같은 곳에 가서 기념품도 좀 사고, 저녁에는 온천호텔에서 온천을 하고 야끼니쿠를 먹었다.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는데 아부지가 계속 구운 고기를 받아먹기만 하고, 꿈쩍도 안 해서 조금 화가 났다.
엄마는 소화가 안 된다고 해서 혼자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짧은 여행이지만 가족들과 오붓하게 식사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 날 마지막 식사는 나리타 공항 근처 개상이의 옛 일터와 가까운 맛집에서 오코노미야끼를 먹었다.
막판에 크게 싸울 뻔했지만, 다행히도 싸우기 전에 여행이 끝이 났다.
역시 가족 여행이 젤루 힘들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즐겁게만 놀러 다닐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으니 말이다.
돌아보면 여행은 다 추억이고 그립기 마련이라, 힘든 거 알면서도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긴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휴식이 필요했는데 도쿄에 있었던 시간이 그나마 좀 편히 쉴 수 있어 좋았다.
쉴 틈 없이 여행만 하고 살다가 다시 일상으로 오니 '노잼'의 시기가 오고 있다. 이 권태를 부디 잘 극복하고 재미를 되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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