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해를 경유하여 부산에 도착한 나는 아침부터 서브스턴스를 보고, 청국장을 먹고, 서둘러 일본을 갈 준비를 했다.
홋카이도는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니 설향에서 신었던 털신과 군밤장수 모자를 챙기고, 친구들이 남겨둔 한국 핫팩도 든든하게 챙겼다.(일본, 중국 핫팩 저리 가라 한국 군용 핫팩이 짱이야)
여행 성수기에 공항이 붐빌 거라 생각해서 당일 아침 일찍 서둘러 김해 공항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붐볐지만 화장실 좀 갔다가 엔제리너스 근처에서 아침을 때우고 나니 금세 출발시간이 됐다.
치토세 공항에서 삿포로 숙소까지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이후 비행 편을 모두 변경하는 바람에 나는 일행들과 출도착 시간이 달라졌다.
비행시간이 짧기도 하고 30분 정도 차이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도착할 무렵 삿포로 치토세 공항의 입국 심사줄이 1시간 넘게 걸렸다.
이 시기에 한국 관광객들이 정말 많다는 걸 새삼 실감하기도 했다.
나를 뺀 나머지 셋은 먼저 도착해서 편의점도 들르고, 환전도 일찌감치 끝내 놓은 상태였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허덕이면서 ATM기로 갔는데, 트래블로그 현금 인출 비밀번호를 까먹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비밀번호를 재설정해야 했다.
삿포로 시내에 도착해서야 겨우 해결이 되긴 했지만, 초반에 여러 일로 진땀을 뺐던 것 같다.(비행기 안에서 하드 렌즈 한 짝도 잃어버리고 내릴 때쯤 다행히 찾음)
렌터카를 빌리고 나서 바깥 풍경을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직 삿포로 시내 구경도 못했는데 벌써 해가 지다니.
그래도 왠지 그 풍경이 낭만적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것 같고 설렜기도 했다.
핸들방향이 달라서 처음엔 겁나고 무서운 운전이었지만, 다행히 목숨을 잃지 않고 스스키노역 근처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으러 수프카레 집을 들렀다. 어딜가나 웨이팅이 있어서 그나마 사람이 적은 줄을 택했다.
스프카레 매운맛을 시켰는데 생각보다 매웠다.
초반에 나온 샤베트도 맛있었는데, 카레 먹고 나중에 먹었으면 더 맛있었을 것 같다.
눈 내리는 길거리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 사 먹고, 가챠샵 구경하고, 편의점에서 먹고 싶은 간식들도 잔뜩 골랐다.
매일 새로운 간식들을 먹으며 샘들이랑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참 좋았던 것 같다.
홋카이도는 처음이라
일본은 너무 많이 가서 특별히 또 가고 싶은 여행지는 아니었지만, 홋카이도는 달랐다.
겨울의 홋카이도는 눈 쌓인 풍경과 맛있는 음식이 기대가 됐기 때문이다.
홋카이도에 가기 전 그곳의 정취를 느끼려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First Love 하츠코이'를 시작했다.
주인공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와 홋카이도의 설경이 아주 예쁘게 담긴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드라마다.
비록 일행 중에 이 드라마를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지만 차에서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 노래를 함께 들으며 추억 갬성을 느꼈다.
오랜만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라서 그런지 나뿐만 아니라 다들 이제야 해외여행을 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줄곧 중국에 있으면서도 오래 있다 보면 여기가 다른 나라라는 느낌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어가 입에 붙지 않아서 계속 '아리가또' 보다 '씨에씨에'를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한자어를 읽을 때는 중국어와 일본어가 섞여서 나왔다.
일본어를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식당 예약과 소통 담당을 자처했지만, 돌발 상황이 되면 결국 애매한 일본어보다 영어를 하는 쪽이 나았다.
어쩌다 0개 국어 여행자가 되었지만, 언어가 서툴러도 괜찮았다.
한국어 번역기능을 써주는 친절한 호텔직원부터 언어는 잘 안 통해도 성심 성의껏 서비스를 해주는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여행은 3년 간 힘든 중국 생활을 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서 새로움을 맛보는 사소한 순간들이 기쁘고 좋았다.
삿포로와 오타루
차를 빌려 홋카이도를 자유 여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삿포로에서 출발해서 오타루를 당일치기 여행하고, 비에이 백은장에서 눈썰매를 즐기고, 마지막 날은 노보리베츠 온천 마을에 갔다.
매일 숙소를 옮기고 장거리 운전을 해야 했지만, 운전도 점점 익숙해지고, 겨울은 짧으니 아침 일찍 서둘러 이동만 하면 위험한 일도 없었다.
첫날 삿포로에서는 저녁밥을 먹은 것 말고는 한 게 없었다.
하룻밤만에 정든 삿포로를 떠나는 것은 아쉬워서 메가돈키에서 쇼핑을 잔뜩 학고서 떠껀한 미소 라멘을 먹었다.
오타루로 넘어가서는 오르골 박물관이며, 르타오 본점이며 모두들 가는 코스를 갔는데, 어딜 가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르타오 본점 카페는 웨이팅이 너무 길어서 주변 상점들을 둘러보고 왔다. 기념품샵이 많고 예쁜데, 딱히 살 만한 것은 없었다.
날이 어둑해질 쯤에야 하나둘 불이 들어오니 오타루의 아기자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중국에서 보던 화려한 풍경과는 사뭇 달랐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저녁은 다시 삿포로 시내로 돌아와서 징기스칸(양고기 요리)을 먹었다.
부위별로 조금씩 달랐지만 양에서 냄새가 나긴 했다. 맥주랑 김치랑 같이 먹으면 느끼함이 덜했던 것 같다.
같이 갔던 일행 중에 양고기를 못 먹는 분이 있어서 약간 걱정했는데, 사이드 메뉴도 괜찮아서 잘 먹긴 했다.
도파민 중독자들의 썰매 타기
비에이로 넘어가서 새우튀김 덮밥으로 유명한 준페이 식당을 갔다.
단체 관광객 무리와 딱 마주쳐서 한 끗 차이로 엄청난 웨이팅이 생겼다.
번갈아가며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웨이팅이 끝나있었다.(화장실이 한 칸이라서 엄청 오래 기다림)
시끌벅적하게 한국어가 오가는 식당에서 새우튀김도 맛나게 먹고, 크리스마스트리를 구경하러 갔다.
처음엔 여길 왜 가지 싶었는데, 직접 가서 풍경을 보고 사진에 또 담고 나니 왜 가는지 알겠더라.
날씨도 너무 좋았고, 주변 마을 풍경도 너무 예뻤다.
근처 세븐 일레븐에서 라떼도 사 먹었다. 커피 내리는 기계는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데, 생과일주스를 만들어 주는 기계도 있어서 신기했다.
눈이 점점 쌓이는 산속으로 들어가니 유명한 백은장이 나왔다.
여기는 눈밭에서 썰매나 스키를 탈 수도 있고, 온천욕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눈밭에서 신는 신발(이거 안 신으면 걸을 수가 없음)과 썰매를 빌려서 엉덩이가 갈려나갈 때까지 몇 번이고 썰매를 타고 놀았다.
우리끼리 화기애애하게 노느라 사진은 많이 못 찍었는데, 샘들이 썰매 타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영상을 많이 찍어두었다.
새하얀 눈밭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마음껏 놀았다.
눈썰매를 다 타고나서는 백은장 안으로 들어가서 온천을 즐겼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겨울왕국인데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니까 진짜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숙소는 아쉽게도 백은장을 예약을 못해서 숙소가 있는 다른 곳으로 넘어가야 했다.
해 질 무렵 즈음에 청의 호수를 들렀는데, 겨울이라 호수도 얼었고 조명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볼 것이 거의 없었다.
숙소 근처 마을에는 금방 도착했는데, 주차장을 못 찾아서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들어갔다.
저녁식사는 뷔페식이었는데, 먹을 것이 너무 많았다.
욕심을 내려고 이것저것 다 맛보다가 마지막엔 참치회 털어먹기로 정착했다.
다음날 아침도 진수성찬이었는데, 저녁보다 아침이 더 입맛에 맞았다.
홋카이도는 해산물 말고도 모든 음식 재료가 다 신선하고 너무 맛있었다.
노보리베츠 온천 마을
숙소 바로 옆에 흰 수염 폭포가 있었는데, 깜빡 잊고 바로 갈 뻔했다.
차를 돌려서 다시 돌아와 폭포를 감상했다. 못 보고 갔으면 아쉬웠을 만큼 풍경이 멋졌다.
노보리베츠는 확실히 비에이보다 규모가 크고 마을 전체에 유황냄새가 날 정도로 온천이 흐르는 마을이다.
염라대왕 같은 분이 지키고 있는 곳에 오미쿠지 뽑는 기계가 있어서 뽑았더니 中吉이 나왔다.
힘든 일도 있지만 좋은 일도 있다는 그런 뻔한 멘트가 나와서 실망했지만, 나쁜 건 아니라 다행이라 여겼다.
도깨비 방망이상 근처에 가서 재물운도 빌었다. 어떻게든 올 한 해 잘 되게 도와주십셔
이곳 숙소도 저녁 식사가 뷔페식이었다. 각종 해산물 요리도 맛있었지만, 대게를 무한정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밥 먹고 온천을 하러 갔는데, 거기에 미끄럼틀이 있었다. 우리는 또 엉덩이를 갈아 넣으며 신나게 미끄럼틀을 탔다.
나는 원래 뜨거운 물에 오래 못 있어서 조금만 있어도 금방 찬물로 갈아타는데, 다들 몸이 벌게지도록 온천을 했다.
마지막 온천이라 아침까지 야무지게 즐기고, 다시 치토세 공항으로 먼 여정을 떠났다.
나는 가족 여행 때문에 일본에 더 남긴 했지만, 홋카이도가 좋아서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맛있고, 즐겁고, 유쾌하고, 신나는 여행이었다. 여행기를 쓰면서 복기하니 또 가고 싶어졌다.
겨울에 홋카이도를 갔으니 다음엔 오키나와를 가보고 싶기도 하다. 도쿄는 이제 그만 가고 싶고, 새로운 일본 여행지를 골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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