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미국
국경절 연휴는 참 길다. 날씨도 선선하고 딱 좋은 10월 초에 해마다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특권이다.
다만 이 시기에 중국 안에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인파를 피해 편하게 여행을 하는 일이란 늘 쉽지 않았다.
그렇담 이번엔 중국이 아닌 더 먼 곳으로 떠나보자 해서 행선지를 미국으로 정했다.
여행지로서 미국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미국이라니.
사실 3개월 전 개상이가 미국으로 출장 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은 쉽게 하지 못했을 거다.
동생이 출장차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그 숙소에 꽁으로 지내면서 여행을 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으나, 나의 희망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생의 출장 일정이 계속 딜레이 되더니 결국엔 출장 일정이 통째로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나는 이미 비행기표와 ESTA 비자까지 발급을 마친 상태였고, 더구나 비행기표는 취소가 불가능한 표였다.
주말 내내 계산기를 두드리며 머리를 싸매다 결국 혼자 가더라도 미국 여행을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놀랍게도 장가계 여행 때와 비슷한 사고과정이네)
혼자 가면 돈은 펑펑 쓰겠지만, 그만큼 재밌게 놀면 되지 뭐. 처음엔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걱정이 됐다. 미국은 총도 있고, 아시안 여성이 혼자 여행하기에 아주 좋은 나라도 아니다. 더욱이 환율도 안 좋은 때에 까다로운 팁 문화 같은 건 아무리 친절한 설명들을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에서 경유 환승을 해야하며, 가는 데만 20시간 가까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시차도 있고 퇴근하자마자 공항까지 가서 긴 시간 비행해야 하니, 체력도 걱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한몸에 받으며 금요일 오후에 조퇴하고 푸동 공항으로 갔다. 옆자리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는 "총 잘 피해 다녀"였다.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험난한 여정
내가 예상했던 첫 번째 변수는 '비행기 연착'이었다. 국내선과 국제선을 막론하고 저녁에 뜨는 중국 비행기는 (내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80% 이상 연착이 된다.
아직 중국 사람들 기준으로는 국경절 연휴가 시작되지 않은 날짜라 푸동 공항은 비교적 한산했지만, 나는 제시간에 비행기가 뜰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출발 2시간 전에도 지연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항공사의 실수인지 착각인지 내 여권이 북한 여권으로 잘못 등록되는 바람에 공항에서 비행기표를 한번 더 확인하고 체크인을 했다.
온라인 체크인을 했음에도 전날 저녁까지 좌석이 배정되지 않길래, 오버부킹일까 봐 내심 걱정했었다.(자본주의의 나라 미국에선 오버부킹이 흔한 일이라고 한다)
일찍 공항에 도착한 김에 카운터에 가서 물어보니 금방 해결은 되었다.(돌아오는 티켓 역시 온라인으로는 좌석 배정이 안 되었지만 카운터에 갔더니 금방 해결은 됨- 중국 출도착 비행기는 온라인 체크인이 안 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두 번째 변수는 '입국 심사'였다. 영어를 안 쓴 지 오래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찾아본 입국심사 괴담 같은 걸 찾아보면서 많이 겁이 났다.
시애틀행 비행기를 타기 전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가 'MPC'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어플을 설치 후 사전 정보만 입력하면 입국 심사가 간편해진다는 것이었다.
하라는 대로 등록하고서 MPC 줄로 갔더니 정말 물어보는 질문도 몇 가지 안 됐다.
-어디를/얼마나 여행할 거니? / 어디에 묵을 거니? / 그곳에서 뭘 할 거니? / 가지고 있는 현금은 있니?
긴장감에 조금 버벅대긴 했지만 별문제 없이 다 통과됐다.
거의 30분도 안 되어서 입국 심사와 짐 검사가 끝났다.(정말 중국에 비하면 초스피드다)
비행기가 지연될 것까지 고려해서 6시간이나 긴 환승시간을 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시애틀 시내라도 나가서 구경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은 두려운 것도 많고 헤맬 것 같아서 공항 안에만 있었다.
시애틀은 스타벅스 1호점이 있는 곳이니 시그니처 메뉴라고 하는 펌킨 어쩌구를 시켜보았다.
첨엔 달달하고 맛있었는데 먹다 보니 물려서 다 먹진 못했다.
여행 준비를 완벽하게 하지 않고 출발했었어서 경유 시간 동안엔 여행 정보를 서치 했다.
미국에서만 사용하는 어플은 애플 스토어 앱에서 미국 계정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데(이건 중국에서도 그렇다) 그걸 만들고 필요한 어플들을 설치하고 나니 훨씬 수월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유용했던 어플들을 정리해 보자면.
우버 앱은 원래 있었지만 여기서는 '리프트(Lyft)' 어플이 더 싸고 간편했다. 스벅도 미국 스타벅스 어플을 따로 설치하면 사이렌 오더식으로 주문도 빨리 할 수 있고 포인트도 많이 쌓인다.(대신 신용카드로만 결제가능)
LA 대중교통수단은 '탭(Tap)'이라는 어플에 현금을 충전해 놓고서 이용하니 편했다.
미국 국내선을 타고 이동할 때는 델타항공과 아메리칸 항공을 탔는데 이것도 어플을 깔면 편한 점이 많다. 라스베가스에서는 체크인할 때 MGM 어플을 설치해서 등록하면 호텔 룸키도 휴대폰으로 대체인식이 가능했다.(이건 정말 신기했음)
미국 번호가 없어서 배달 어플은 깔아놓고서 써보진 못했지만, 미리 유심을 샀더라면 이것도 꽤 유용하게 썼을 것 같다.
지나고 보니 바탕화면에 어플이 가득해졌다만, 여행 동안에는 알차게 썼으니 대만족이다.
미국 호텔은 다 이런가요
무튼 예상했던 변수 두 가지를 쉽게 통과하고 나니 이제 미국에서 살아남기 미션은 가벼운 것들만 남았다.
나는 동생이 출장 가기로 했던 피닉스 공항 근처 호텔에 묵고 나서 다음날 LA로 가야 했으므로 호텔로 향하는 공항 셔틀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밤늦은 시간에 길을 헤맬까 봐 일부러 공항 근처 숙소에서 묵고, 공항 셔틀도 있는지 미리 확인해 두었다. 직원이 가르쳐준 곳에 갔더니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안심이 되었다.
나는 아메리칸 항공 승무원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예약해 둔 크라운 호텔로 향했다. 내릴 때쯤 모두가 버스 기사에게 팁을 주길래 나도 주섬주섬 현금을 꺼냈는데, 1달러 정도의 잔돈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고 10달러를 주고 거슬러 받았다.
첫 숙소였던 크라운 호텔은 정말 별로였다.
깔끔하고 정돈된 인테리어였지만 숙소에 아무것도 비치된 것이 없었고, 물도 없다.
그저 얼음을 담을 수 있는 양동이와 커피 머신만 있었다. 이것들은 죄다 물이 있어야 작동하는데 물은 데스크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조식도 불포함인 탓에 커피 한 모금 없이 아침에 이동하는 건 지옥 같았다.
목이 너무 말라서 직원에게 커피를 살 수 있는 곳이 있냐고 물었더니 조식당에서 가져온 듯한 커피 한 잔을 나에게 서비스로 주었다.
하룻밤 20만원을 주고 묵은 숙소에서 물 한 잔과 커피 한 잔을 구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니. 나이스하고 친절한 직원이었지만 내 기분은 그저 떨떠름했다.
LA로 넘어가서는 한인 민박 숙소와 호텔을 예약해 뒀는데, 모두 하루 10만원 안팎의 비용이었다. 피닉스가 분명 LA 물가보다 더 싸다고 들었는데 그제야 나는 호텔비로 너무 말도 안 되는 비용을 지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날도 원래 크라운 호텔로 예약해 뒀었지만, 취소하고 숙소를 더 싼 곳으로 바꿔서 예약했다.
돌아가는 날은 새벽 출발 비행기를 타야 해서 깜깜한 시간에 이동했지만 그래도 셔틀이 있어서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주변에 간단한 식당도 없고 서비스 물도 없어서 점심에 공항에서 산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하룻밤을 연명했다.
피닉스에서 묵었던 두 호텔은 정말 공항이 가깝다는 장점 외에는 아무것도 좋은 점이 없었다.
*물론 그 가깝다 기준도 차로 10분 이내라는 것뿐, 짐을 들고 걸어서 갈 정도의 거리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미국 호텔이 이렇게까지 기본적인 어메니티가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갔던 게 문제기도 했다.
원래 챙기려고 했으나 짐을 줄이기 위해서 뺐던 슬리퍼, 미니 커피포트, 텀블러를 잘 챙겼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미국 국내선 비행기 탑승하기 -아메리칸 항공
피닉스에서 하루 묵고 난 뒤 다음날 오후 비행기를 타고 LA로 떠났다.
미국 국내선은 값이 저렴하고 비행기도 참 많은 편이다.
스피릿항공과 프론티어 항공이 훨씬 값이 쌌지만, 휴대 수하물 제한도 엄격하고 위탁 수하물 비용도 비싸서 짐이 있는 여행객은 결국 비싼 표를 구매하게 된다.
게다가 서비스 평판도 나쁘길래 그냥 표값이 조금 더 비싼 아메리칸 항공을 선택했다.
아메리칸 항공은 좌석도 넓고 수하물 제한도 거의 없었다. 나는 짐을 2개 들고 탔는데, 캐리어 크기만 보고 무게 검사도 하지 않았다.
위탁 수하물이 없다면 그냥 어플로 스마트 체크인 후 짐 검사만 받으면 끝이다.
중국도 국내선 비행기로 여행하는 일이 많지만 국내선 짐 검사는 국제선 탈 때보다 더 엄격하게 굴 때가 있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항공사 직원도 훨씬 친절하고 서비스도 좋다.(너무 웃고 인사 많이 해서 불편할 정도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발을 디딘 지 겨우 이틀째이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나 힘든 과제가 없었어서 아직까지는 순조로운 여정이라 여겨졌다.
LA에 오면 LA 갈비를 먹어야지
LA 공항에서 도착해서 한인 민박까지 가는 길은 한인 택시를 미리 예약했다.
숙소에서 알려준 카톡으로 연결하니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이 공항에 마중을 나오셨다.(너무 어르신이라 좀 놀랬음)
공항에서 숙소까지 꽤 멀기도 했고, 여행 초반에 한국어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LA에서 뭐 할 거냐고 하시기에 내일 유니버셜 가고 하루 더 놀다가 라스베가스로 넘어가서 그랜드 캐년 투어를 할 거라고 했다.
기사님은 근처에 싸고 맛있는 한식당도 소개해주시고, 라스베가스는 무조건 공연을 하나는 봐야 한다며 추천해 주셨다.
원래는 공연 볼 생각이 없었는데 기사님이 추천하시길래 냉큼 KA쇼를 예약했다.(최근에 생긴 스피어 공연을 볼까 하다가 그다지 내용이 중요한 공연은 아닌 것 같아서 KA쇼로 바꿨는데 나쁘진 않았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나서 바로 간 곳은 LA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북창동 순두부'다.
중국에 오래 살다 보니 맛있는 한식은 언제나 그리운 법이다.
주말이라 웨이팅도 길었지만 찬 바람맞으며 기다렸더니 금세 내 차례가 왔다.
LA갈비와 순두부 세트를 시켰는데, 반찬도 다 맛있고 LA 갈비가 특히 맛있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더 쫀득하고 맛있어서 혼자서 거의 2인분을 다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배가 부른 상태로 그리피스 천문대의 야경을 보러 가려고 리프트(공유 택시 어플)를 불렀다.
근처까지 도착했는데 기사님이 콘서트 때문에 차량이 너무 많아 진입이 불가하다고 했다. 그리고 밤에 혼자서 걸어가는 것도 위험하다며 웬만하면 낮에 가라고 했다.
LA는 정말 밤길이 무섭다. 나는 LA야말로 한인들도 많이 살고 관광지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일반적으로 다들 차량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드물고(걸어 다니는 사람은 노숙자와 강아지 산책 시키는 사람들뿐임) 범죄가 일어나도 처벌 수위가 높지 않아서 차량 유리를 깨고 물건을 훔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주차장 바닥에 차량 유리파편이 잔뜩 깔려있음)
천문대는 어차피 다른 날에 또 가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고, 기사님께 차를 돌려 숙소로 가달라고 했다.
아까운 택시비를 보며 마음은 아팠지만, 여행은 늘 예상치 못한 일들 투성이니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돌이켜 보니 LA에서 한 일은 LA 갈비와 순두부 먹기밖에 없었던 하루였다.
이렇게 느슨하게 LA 여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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