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는 즐거워/책

하치와 나나(NANA 다시보기)

슬구 2019. 8. 3. 20:27

무더운 여름방학의 시작. 더운 집구석을 탈출하여 카페나 만화방을 순례중이다.

 

작년 요맘때는 추억의 <너는 펫>을 읽으며 방학을 만끽했는데 요번에는 홀린듯이 <NANA>를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끝까지는 한번에 다 못 읽을 분량이라 틈틈히 읽다보니 현재 9권까지 봤다. 꿀잼이다. 

 

초반에는 진도가 쭉쭉 나가다가도 7,8권 무렵부터는 하치와 나나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깊어지면서 머리가 터지기 시작한다. 볼 때마다 같은 부분에서 눈물이 나고 이들에게 곧이어 닥쳐올 시련과 비극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노부의 솔직담백한 고백신에서 항상 눈물이 난다ㅠ

 

내가 <NANA>를 처음 접했을 무렵에는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인 하치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었다. 쉽게 남자에게 반해 버리고 나나와의 의리며 노부의 마음을 등지고서 잘나가는 뮤지션과의 결혼이라는 야망을 택한 하치의 결정을 납득하기 어려워서다.

 

지금에 와서는 하치의 심정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모두의 비난을 감수하고 나만의 행복을 찾을거야! 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이미 궁지에 몰려 어떻게든 벗어날 수 없는 하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타쿠미가 나쁜 남자라는 걸 하치도 만날 무렵부터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에게 인생을 걸고 싶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을 거다. 외로움을 달래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했을 뿐인데. 대마왕에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건지 하치는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그러므로 피임이 뭣보다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우쳐 준다. 빌어먹을 타쿠미녀석)

 

나나 역시 하치를 잃게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어쩐지 노부보다 나나의 상실감이 더 컸다는게 참 아이러니하지만) 분함을 참지 못한다. 영원히 자신의 정원에서 사육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하치가 '남의 것'이 되었다는 건 남다른 소유욕을 가진 나나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준다. 

 

나나에겐 렌이 있지만, 렌과의 연애가 아무리 자물쇠처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더라도 하치와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나와 하치의 관계를 떠올리면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가 생각났다. 끈끈하게 연결되었던 사람과 헤어지는 일은 그 상흔이 오래 남는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 최은영, <씬짜오 씬짜오>

하치에게 나나는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와도 같았고. 언제나 나나의 빛나는 모습 속에서 있고 싶었던 하치의 염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 불꽃놀이를 추억하는 하치의 내레이션은 너무 처연하다. 

있잖아, 나나.
그날 밤 새겼던 내 염원은 지금도 빛바래지 않은 채 내 가슴 속에 있어.
우리가 그리던 꿈의 광채를 잊지 말아줘.
- 야자와 아이, <NANA>

내레이션은 줄곧 하치의 시점에서 전개되어서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진 때에 나나의 심정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나나는 하치에게 어떤 말을 가장 하고 싶었을까. 왜 그 말을 나나는 전하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ㅠㅠ

 

<NANA>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다. 만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사랑을 하고 있든 하지 않고 있든 본연의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 대며 끝내 파국의 길로 들어선다. 발랄한 소녀만화와 같은 겉포장지를 하고 있지만 인생은 그렇게 달콤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NANA> 1권이 나온지 벌써 19년이 흘렀다만 오랜시간 동안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들은 아직도 아련하다. 야자와 아이는 진심 천재인 것 같다. 작가의 건강상의 이유로 연재가 중단된 지 오래되었다. <NANA>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작가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