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쓰기/보여주는 일기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이야기

슬구 2020. 4. 6. 00:43

너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이 들었던 게 하루이틀이 아니지만, 언젠가 이 모든 걸 실토하게 될 날이 올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 날의 내 기분이나 상태에 달려있겠지만. 그런 일촉즉발의 위기가 오지 않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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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네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싶어하지. 넌 높은 도덕적인 신념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으며 살아왔어. 네게 기회를 주지 않는 세상에 원망 한번 품은 적도 없는 선량한 청년이야. 그래서 너는 쉽게 꼰대가 될 지도 몰라.

네가 세상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고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늘 불만이었지만, 이해하려고 애썼어.

나는 너한테 애정을 보이면 네가 나에 대해서 만큼은 기존에 네가 알던 틀을 깨고 다르게 받아들여 줄 거라 기대했거든. 

근데 차곡차곡 이유와 변명만 늘 뿐, 너는 여전히 너만의 사각지대가 있고, 등불을 비추면 요리조리 잘 피해가. 가끔 나는 너를 곤란에 빠뜨리고 지치게 하는 사람일 뿐이었어.

그럼에도 너는 자주 내게 말을 걸어. 연애 얘기도 하고 싶어하고, 학창시절 얘기, 요즘 사는 얘기도 나누고, 영화나 취미도 공유하고 싶어 하는데. 

가끔 나는 네가 다른 세계에서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설 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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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진 끔찍한 선입견과 편견에 가끔 놀라고 종종 식겁해.

네가 내 말을 너무 자주 오해를 해서 나는 말을 길게 하는 습관마저 생겨버렸어. 나는 점점 너한테 많은 설명이 필요함을 느낌과 동시에 피로해졌어.

네가 종종 헤어진 여자친구들을 '썅년'이라 욕할 때. 남초 직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존재를 불편스럽게 말할 때. 성매매 여성들을 지나치게 비난할 때. 나는 모든 여성을 '그런 여자'로 일반화하는 게 참 불편했고, 거북스러웠어.  

심지어는 화도 냈지. 어떤 문제든 '친절한' 설명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너의 오만함에 기분이 나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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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피곤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어.

너도 내게 관심을 주고, 그런 네가 싫지 않아서 연락을 긴 시간 주고 받았는데도 오히려 오만 정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서 나는 작년부터 너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어.

1년 간 잠수 끝에 나는 널 불러냈어. 진짜 끝내고 싶었거든.

근데 나는 비겁하게도, 내가 뒷통수쳤다는 죄책감을 가지기 싫어서 그 때 말을 꺼내지 못 했어. 다시 안 볼 생각도 하고 있었고, 널 다시 보는 것도 불편했는데. 결국엔 다시 보자고 했어. 그날 이후 연락도 그냥 받았고.

아마 네가 슬픈 일이 많았던 해라서. 슬픈 표정으로 웃고 있어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

난 널 슬프게 하긴 싫거든. 네 비참한 얼굴도 보기 싫고. 너에 대한 신비로움은 진작에 벗었지만 근데 넌 진짜 약하고, 외로운 사람이더라. 나보다 더.

네가 휘청거릴 때 나마저 널 놓으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널 못 놓겠어. 이게 우정인지 인지상정인지 가끔 헷갈려. 

위태로운 우리 관계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었지만. 후자인 적이 더 많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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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서 우리 관계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이유는. 아마도 네가 다시 여자친구와 이별했기 때문이겠지.

넌 여자친구가 없을 때나 나를 찾지. 나는 그게 참 맘에 안 든다.

넌 날 친구로 생각하는 걸까. 가끔은 이런 의문이 들어.

매번 일회용 데이트 상대인 것 같고. 썸타는 기분을 채우는 용도로 내가 쓰이는 것 같고. 내게 직접적으로 플러팅을 하진 않지만 적어도 내 기분이 상할만큼 우리 관계를 가볍게 쓰는 건 같아.

너랑 간편한 감정의 교류는 참 쉬운데, 그건 서로의 불평을 들어줄 때나 그렇고. 진심으로 날 이해해주거나 내가 널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그래서 참 공허해.

그럴 때마다 너는 관계를 쉽게 포기 하지 않고, 곁에 두고자 하는 사람은 끝까지 남긴다는 말을 했던 게 생각나.

근데 그거 친구 아니잖아. 예비용 저축같은 거지. 

네가 더 잘 됐음 좋겠어. 나 따위가 필요 없게. 나도 너 따위가 필요없어졌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