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코로나와 함께 사라지다
방학숙제를 덜 끝낸 학생처럼 내내 끙끙 불안을 앓기만 하다가 호다닥 2월이 가버렸다.
개학은 늘 두려웠지만, 개학이 연기됐단 소식은 또다른 불안감을 부추겼다. 이젠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은 일이 되었다.
매일 확진자가 몇 백이 넘어간다는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다가도 우연히 듣게 될 누군가의 혐오 발언이 무서워서 외출을 꺼렸다. 대부분의 약속이 취소 되었고, 평소처럼 혼자의 시간을 보냈다.
강제로 집에 누가 앉혀 놓지 않아도 나는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외출이 필요할 땐 그게 정말 필요한 일인지 스스로 따져 물으며 결국엔 안 나가기 일쑤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 그렇게 따져물을 필요가 없어졌다. 아주 가벼운 죄책감을 가방에 넣고서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나는 대의명분이 세상 제일 중요한 사람인 것이다.
슬슬 개학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2월 마지막주의 시간들이 빠르게 지나갈 무렵,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준비라고 해봤자, 마음의 준비 정도겠지만. 집에 있을 때 전혀 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라도 해둘 걸. 당장 내일 출근하면 다시 제로부터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아 괜스레 반성, 후회하는 척을 했다.
그래도 그간 했던 일들을 떠올려 보면 나름 뭔갈 하긴 했다.
- 조합원들과 2030 모임을 만들고자 2명에게 연락했고, 1명과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도 이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의 작은 목표에 동의해 주는 분들을 만나서 조금은 안심했다. 학교에서 새롭고 낯선 사람들에게 부러 친절하거나 부러 불친절하게 대했다. 이제는 정말 이별이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은 동전의 양면이다. 뒤집어지지 않는 동전이란 없는 걸까.
- <작은 아씨들>을 봤다. 나는 역시 조와 로리의 줄타기가 제일 재밌었다. 시얼샤 로넌과 티모시 샬라메의 케미가 좋았던 건 지도? 광대가 아플 정도로 계속 웃고 있었다. 그레타 거윅의 영화를 계속 보고싶다.
- <가유니시최봉적>을 다 봤다. 중드는 길어서 끝까지 보고 나면 이 긴 시간 동안 고생을 함께 한 배우들에게 동지애가 생기는 것 같다. <진혼>은 형제애로, 이건 가족애의 의리로 끝까지 다 봤다. <돌아온 시효경찰>을 보며 잠깐 숨을 돌렸는데 미키 사토시의 세계는 정말 지루할 틈이 없이 재미나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2>는 역시 기대에 못 미쳤고, 라라진은 예뻤다.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의 특별판을 봤다. 역시 잘생기고 순종적인 연하남이 짱이야.
- 생각하지 않는 자극적인 드라마로 도피하고 싶어서 <내하보스요취하>를 시작했고, 발암용 아침 드라마였다. 어떤 장면에도 몰입하며 볼 수 없었다.
-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을 읽으면서 이기적인 나를 길러준 엄마 생각을 했고, '불행'은 '힘듦'과 다른 말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어른이 되면>을 보고 나니 팟캐스트에서 혜영이 가족들 앞에서 '혜정에게 모두 사과해야 해'라는 말을 했다는 게 계속 떠올랐다. 아직도 이것과 관련해서 읽어야할 것들은 산더미다.
- 김초엽의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페미니즘 교실>을 읽기 시작해서 자료조사 하는 기분으로 후루룩 다 읽어버렸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는 호기심에 열어 봤다가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여자 둘이 살고있습니다>가 현실적인 거주 방식을 고민하게 했다면 이건 앞으로의 연애와 사랑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나도 하나의 주제로 글을 꾸준히 써야겠다.
내가 누리는 자유가 당연한 것이 아니고, 불평등에 기반한 사실이라는 걸 더 자각하는 요즘이다. 나는 학교에서 교실에서 기득권에 자리하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부당한 일들과 차별에 가담할 수 있다. 더 많이 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책임감의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홀로' 서기가 아니라 '같이' 가기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솔직한 생각을 나눌 친구들이 꽤 많이 생겨버린 덕분이다.
3월이 왔다. 이제 정신 차리고 눈을 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