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라도 떠나고 싶다/중국, 일본(2024 겨울)

21일 간의 동북아시아 일주 - 2 (하얼빈 편)

슬구 2025. 2. 23. 16:35

중국 중남부에서 동북으로

'동북아시아 일주'라고 제목을 거창하게 짓긴 했지만 사실 중국 안에서의 이동거리가 가장 길었다. 

거리가 긴 만큼 청두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편도 비행기 값도 매우 비쌌다.(경유를 해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돈이 크게 절약되지도 않아서 그냥 직항을 선택함) 

날씨도 많이 다르다. 청두는 쌀쌀했지만 1월에 꽃이 필 정도로 따뜻한 기온이었고, 하얼빈은 영하 20도가 기본인 겨울왕국이다. 

본격 추운 날씨에 맞게 옷차림을 바꾸고 준비해온 털부츠와 군밤장수 모자를 꺼냈다.

하도 하얼빈 춥다는 얘기를 많이 전해들어서 미리 핫팩이며 방한용품을 잔뜩 준비해 갔는데, 실제로 춥긴 했지만 뭐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었다.  

택시 기사님들이 말하기를 최근 하얼빈이 평년 겨울 기온보다 높아서 춥지 않은 날씨라고 하긴 했었다.

하얼빈에 가서 신기했던 점 또 한가지는 중국 사람들이 정말 표준의 '보통화'를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본토 사람인지 아닌지를 불문하고 다들 제각기 개성 있는 발음과 성조로 말한다.

내가 듣기로는 모두 표준의 보통화가 아니지만, 그들은 외국인인 내가 구사하는 말만 집요하게 못 알아듣곤 한다. 

하얼빈에서 만난 택시 기사, 식당 직원, 호텔 서비스 직원들은 모두 놀랍도록 정확한 발음으로 알아듣기 쉽게 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중국어를 하면 보통 '중국어 하는 사람(중국 지방러 or 외국인)'으로 인식했었는데, 우리의 중국어를 듣고 단번에 "너네 한국인이지?"라고 알아채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북지방에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긴 하지만 조선족의 중국어와 한국인이 구사하는 중국어도 다를테고, 그걸 단번에 짚어내는 것이 또 신기했다.

중국은 참 이렇게 각양각색의 문화와 언어가 있는 나라라서 흥미롭다.

 

설향(中国雪乡)에서 눈 구경하기

우리는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잠만 자고서 바로 설향으로 떠났다. 

하얼빈 숙소에서 내려다 본 아침풍경

설향은 하얼빈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눈 덮인 마을의 풍경이 동화같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화장실이 깨끗한 숙소를 원했는데, 다행히 숙소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바닥온돌 같은 시스템도 있어서 방안이 따뜻했다)

숙소에서 소개해 준 바오처(차량기사+렌트)를 타고 긴 시간 눈길을 달려 설향에 도착하니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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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권을 사서 셔틀을 타고 마을 입구에 도착했는데 숙소 직원 청년이 썰매를 끌고 나와서 우리의 짐을 옮겨다 주었다.

마을이 다 눈밭이라서 썰매가 정말 물건 운반용으로 쓰이는가 싶었다. 

청년은 우리에게 놀 곳들을 소개해준다고 했지만, 우리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알아서 놀겠다고 했다.

일단 허기진 배를 채우고, 전망대에 올라가 보고,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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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잠깐 쉬러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고산병 증세와 같이 극심한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잠에 빠져들었는데, 똑똑 소리에 나가보니 청년이 동과(얼린 과일)를 갖다 주었다.

내가 아파서 쉬고 있다고 하니 저녁에 열리는 행사가 많고 야경이 예쁘니 꼭 저녁에 나가 놀라고 조언해 주었다. 

멀리까지 놀러와서 아픈 데다 야경까지 못 보는 건 손해다 싶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낮에 갔던 전망대를 올랐는데, 정말 청년의 말대로 낮의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한참 야경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 중앙 무대에서는 광란의 디스코 파티가 있었다고 한다.

조금 떨어진 위치라서 그런지 하나도 안 들렸는데, 친구가 보여준 영상에 모두가 떼 지어 '아파트~아파트~'하면서 들썩이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디스코 파티는 사실 별로 관심 없었는데 폭죽 행사를 놓친 건 아쉬웠다. 

마지막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건너편에서 폭죽을 터뜨려서 운좋게도 오래 구경했다.

상해는 폭죽이 금지라서 요새 통 볼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또 낭만적인 풍경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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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향은 턱없이 높은 관광지 물가에다가 음식도 형편 없었지만, 진짜 풍경이 그림 같아서 모든 것이 용서되는 곳이다.

짧은 1박 2일이었지만 설향에서 눈구경을 실컷 하고 나니 일찌감치 설경에 미련이 생기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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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 기사님이 눈구경을 더 하라고 몇몇 장소를 들르자고 제안했지만, 우리는 스키도 썰매도 관심 없고 눈은 볼 만큼 봤으니 그냥 바로 하얼빈으로 직행하기를 원했다.

자주 구경하기 어려운 풍경인 만큼 더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인 건 알았지만, 시간을 절약하고 빨리 하얼빈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었다.

 

꿔바로우보다 라피(拉皮)

하얼빈 미식하면 가장 1등으로 꼽는 것이 바로 꿔바로우다. 

재작년 여름에 하얼빈에 왔을 때도 제일 먼저 달려가서 맛보았던 것도 '라오추지아(老厨家)'의 꿔바로우였다.

그 집을 다시 찾았더니 역시나 저녁때 사람들로 붐벼 웨이팅이 길었다.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았던 중앙대가

웨이팅을 걸어 놓은 채로 중앙대가를 구경하다가 같은 상호의 다른 지점을 찾았다. 알고 보니 내가 갔던 곳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곳이었는데, 여기는 웨이팅이 길지 않은 편이었다.

여러 음식을 시키고 차례대로 음식이 나왔고, 배고파서 게눈 감추듯 후루룩 다 먹었다.

라피는 여기서 처음 먹었는데 시안에서 먹은 량피와 다르게 땅콩 소스가 많이 가미되어 고소하고 맛있었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성 소피아 성당에 갔다.

재작년 여름 낮에 여길 방문했을 때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밤에 가니 온데만데 조명을 켜고 화려한 중세 궁중 복식을 한 사람들이 컨셉촬영을 하고 난리였다. 

어딜 가나 모델과 카메라 기사들이 있어서 걸어 다니기 불편할 정도였다.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서 내부로 들어갔더니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지는 공간에서 오래된 건축물을 보는 것이 좋았다. 

다시 거리로 나오니 빙샹티에(마그넷) 가게 여럿 있었는데, 성당을 예쁘게 만든 기념품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길거리에 라티아오와 고추로 만든 빙탕후루가 있어서 비주얼이 좀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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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먹방 콘텐츠로 권했지만, 고추탕후루를 먹는 건 끝내 해주지 않았다.

 

아침시장과 빙등제

하얼빈에는 독특한 아침시장 문화가 있다. 아침에 열리는 시장인데, 먹을 것이 굉장히 다양하고 맛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갔는데 벌써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원래 시장 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다.

친구들이 관심 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하나씩 사 와서 맛보았는데, 나는 계란빵이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카오렁미엔(구운냉면)도 생각보다 맛있긴 했다. 떡이 제일 맛이 없었다.

아침시장을 다녀오니 어느새 마트 오픈시각이 되었다.

친구들이 기념품을 사기 위해 근처 RT 마트엘 갔는데, 마침 같은 쇼핑몰에 라오창춘빙(老昌春饼)이 있었다.

친절한 직원이 메뉴 고르는 법과 먹는 법을 자세히 알려주어서 좋았다.

춘빙은 간단해 보이는 음식이었는데, 맛있게 먹다 보니 금세 배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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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하얼빈을 오겠다고 한 이유는 '빙등제'를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혹여나 표가 다 팔릴까봐 오픈하자마자 예약해서 표를 구입했다. 

주말이라 정말 사람이 많았다. 입장줄이 길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걸어서 나가는 길이  멀고도 멀었던 것 같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하고, 빙설대세계는 너무 넓어서 구경을 해도 끝이 없었다.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리다 보면 금세 주변 친구들이 사라져서 친구를 찾느라 바빴던 것 같다.

얼음으로 만든 남대문의 디테일은 그저 그랬지만 멀리서 존재감을 드러냈고, 확실히 조명이 없으면 밋밋해 보였다.

그렇게 비슷하면서 세계 각국의 건물들을 구경하다가 레이스 감자칩 얼음상을 마지막으로 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시 저녁을 먹기 위해 중앙대가 쪽을 찾았다. 이번에는 이색음식을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러시아 식당을 찾았다. 

따종디엔핑에 엄청난 리뷰 수를 자랑하길래 궁금해서 찾은 건데, 역시나 맛집이었다.

러시아 본토 음식이라기보다는 중국 퓨전 음식에 더 가깝긴 했지만, 특히 버섯 요리는 너무 맛있어서 두 번 시켜 먹었다.

밥을 먹고나서는 근처에서 발마사지를 받았다. 하루종일 걸어 다녀서 발이 아팠기 때문이다.

나는 그럭저럭 피로를 풀었는데, 친구가 불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았다고 해서 서비스가 끝난 직후에 매니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미 비용도 지불하고 이용시간도 끝났기 때문에 사과를 받아도 썩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어딜 가나 이런 복불복의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여행에서는 딱 한 번의 경험으로 100프로의 불운에 당첨되고 만다는 사실이 가끔 서럽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탐방

하얼빈역에 가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

지난번 하얼빈 여행 때 갔을 때 휴관일이어서 입구까지만 갔다가 아무것도 못 보고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개장 시간에 맞춰 갔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날은 1시간 늦게 개장해서 주변 맥도날드와 KFC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외부음식 반입이 자유로워서 맥도날드에서 KFC 음식을 먹어도 된다. 

전시관은 작은 편이었지만 설명이 한국어로 자세히 되어 있어서 관람하기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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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어르신이나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단체 투어로 방문했고, 우리처럼 자유 여행으로 들른 사람들도 있었다.

아침 시장에서 동베이 옷을 사다가 마주친 분들과 여기서 또 한번 마주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안중근 기념관을 돌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서 전날 스쳐지나갔던 자오린공원에 들렀다.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간 거였는데 공원이 생각보다 커서 꽤 오래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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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찾고나니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P 여행자의 좌충우돌 하얼빈 여행

한국으로 돌아갈 친구들은 숙소에서 짐을 챙겨 공항으로 떠났고, 시간이 많은 나와 쀼는 하루 더 여행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하얼빈에 남아서 무엇을 할지는 정하지 않아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움직였다.

친구들을 보내고 나서는 숙소에서 좀 쉬다가 꽁꽁 언 송화강을 구경하러 갔다.

송화강에서 썰매 타는 걸 구경하다가 송화강 케이블카를 타려고 예약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 순서가 오지 않았다.

커피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순서가 급박하게 줄어들더니 우리 차례가 넘어버렸다. 탑승장에 올라가니 아까까지 바글바글 했던 사람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우리가 탄 케이블카는 태양도로 넘어가는 막차였다. 다시 돌아오는 편을 바로 타야 했는데, 그 비용을 지불하긴 또 아까웠다.

태양도는 이미 입장이 마감되어 걸어가는 경로가 막혔고, 나가는 길의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헤이처 기사들이 계속 우리에게 딜을 걸었다)

하는 수 없이 지하철 방향으로 힘없이 걷고 있는데, 운좋게도 어떤 친절한 기사님이 우리를 지하철역까지 공짜로 태워주셨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밤이 되어 깜깜해지니 송화강이 언 것도 잘 보이지도 않고, 대책 없이 이곳에 온 걸 후회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아니었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저녁식사는 바로크 거리에서 해결했다. 

스푸파에서도 나왔던 빠오즈 맛집을 갔는데, 우연히 합석한 자리에 앉은 두 팀이랑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루이씽 커피에서 파는 동리 커피도 맛있었다. 약간 갈아만든 배 맛에 아메리카노 맛이 조금 느껴지는 맛이었다.

다음 날은 동북호랑이를 보러 호림원에 갔다.

평일이라 그냥 가도 괜찮겠지 싶었는데, 무슨 수학여행 단체 관람 온 것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놀랐다.

날씨도 굉장히 추웠고 밖에서 기나긴 대기 줄을 통과한 후 겨우 차량에 탑승했다.

호랑이는 덩치 큰 고양이 같아서, 먹이를 주면 낼름낼름 잘 받아먹는 것이 제법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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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떼지어서 노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었는데, 마지막으로 걸어 돌아 나오는 길에 있었던 우리 바닥이 닭털들로 가득한 모습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심지어 닭을 입에 물고 가는 호랑이까지 보고 나니 새삼 호랑이는 귀여운 육식 동물이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우리의 동물 구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극지 공원에 펭귄 구경을 하러 갔다.

곧 폐장시간이 다가와서 점심도 굶고 택시를 타고 다시 태양도 근처로 갔다.  다행히 우리가 보려는 펭귄관은 영업 중이어서 모든 곳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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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을 보고 나니 또 인형을 사고 싶어져서 핑핑이(그 사람 애칭 아닙니다)를 입양했다.

가방에 달려있으면 미친듯이 흔들리는 것이 제법 귀엽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끼도 못 먹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샤오카오 집에서 꼬치를 왕창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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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랜 시간 비행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었지만, 하얼빈에서 오래 재밌게 논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