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구 2023. 2. 16. 18:10

졸업과 귀국

코로나로 만신창이가 된 채로 연말연시를 보내자, 졸업식이 다가왔다. 1년의 고통을 정산하는 날이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한국으로 떠나버린 뒤기도 했고, 코로나 때문에 다들 힘든 시기를 겪는 와중이라 한데 모여 대면 졸업식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쩐지 휑한 기분으로 졸업식을 끝냈다. 이미 다들 여기저기 흩어져서 어수선한 채로 떠나시는 선생님들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보내드리는 게 아쉬워서 눈물이 계속 났다.  

막판 업무분장 얘기를 전해 듣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듣긴 했지만, 방학동안 어떻게든 잘 풀렸으면 하는 과제로 남았다.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귀국 준비를 시작했다. 

중국발 입국 제한 정책으로 인해 귀국 절차가 까다로워져서 PCR 영문 증명이 되는 병원을 수소문해서 찾고 검사를 받았다.

48시간 이내의 검사를 받고 음성 결과지를 수령하면 되는데, 검사를 출국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받았다. 혹시 이게 문제가 될까 봐 초조해서 전날 또 병원을 방문해서 재검사를 받았다. 

부산행 비행기가 취소되고 급하게 바꾼 표가 마침 대한항공이어서 별 문제 없이 통과가 됐다.(중국 항공사는 보통 검사 시간을 꽤 까다롭게 본다고 한다.) 

물론 가는 길에 우여곡절은 있었다. 아침 8시에 집에 나왔는데 30분이 넘게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기차역과 시간을 급하게 바꿨다.

겨우 잡은 택시 기사님한테 왜 이렇게 막히냐고 하니, 원래 이 시간대는 항상 막힌다고 한다. 우시 살면서 한 번도 교통체증을 겪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의아했지만, 다음부턴 택시 말고 지하철을 이용해야겠다. 

난징 가는 기차를 급하게 바꾸느라 좌석을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마음이 급해서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눌러버린 것인 듯

러산에서 퍼스트 클래스는 타 봤었는데, 비즈니스는 확실히 더 넓고 쾌적했다. 마침 짐이 많았는데 공간이 넓으니 짐을 두기가 편했다.

기내식처럼 간식을 주는 서비스도 있었는데, 기차에선 안 먹고 나중에 비행기 기다리다 배가 고파져서 다 먹긴 먹었다. 물론 맛있진 않았음

012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부치고, 천천히 면세점이나 둘러보려고 했는데  난징공항 출국장 면세점은 모두 닫혀있었다.

비행기가 1시간 연착된 상황에서 배가 고픈데 밥 먹을 곳도 마땅히 없었다. 그저 넋 놓고 기다리기만 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대기하는 시간이 참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비행기에 타자마자 한국어를 하는 승무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줘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원래 정말 맛없다고 생각했던 대한항공 기내식도 그저 한식이라는 이유로 좋았고(고추장 존맛), 비행기 내릴 땐 노을을 보는데 고생길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아 울컥하기도 했다. 

01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행 버스를 탔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잠깐 쉬면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오랜만에 카드결제를 했고(맨날 위챗페이 큐알결제만 함), 사람들이 너무 친절해서 또 감동받았다ㅠㅠㅠ 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많이 목말랐나 봐

다시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여정은 피곤하고 길었지만 오랜만에 밟는 한국땅이라는 것이 그저 좋았다.

 

부산에 오고 나서

입국자용 PCR 검사를 받고, 핸드폰 중지를 풀고 나니 족쇄가 풀린 듯한 기분이 됐다. VPN 없이 자유자재로 카톡과 트위터를 할 수 있다니ㅠㅠ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만든 김치와 꼬막 비빔밥은 여전히 맛있었다. 

01

아부지랑 할무니 산소도 다녀오고, 집에 붙어있으면서 아부지랑 참 많은 얘길 나눴다. 아부지의 슬픔을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아부지가 조금은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엄마 아부지랑 붙어 지내는 동안 가끔 화나고 힘들게 하지만 내가 이렇게 철 없이 지낼 수 있는 것도 다 덕분이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설 연휴에는 친척들이 또 우르르 왔다.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와서 맞이할 준비도 못했고, 손님이 오시면 나는 딸린 객식구처럼 지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명절은 매년 반복되는 '너 나이는 몇이냐' '언제 시집갈 거냐' '살도 좀 빼고 성형 좀 해라' 등등 영양가 없고 해로운 말들이 판을 치는 시간이다. 

마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어른들이 모여서 술을 퍼마시고, 남의 얘기를 하는 모습이 하찮다. 나는 1년 만에 본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기도 바쁜데, 친척들이 오면 그 시간을 뺏기는 기분마저 든다.

할무니 제사 때는 무려 3년만에 친동생을 만났는데, 친척들이 또 오는 바람에 우리 가족 넷이서 밥을 먹을 시간도, 대화를 진득하게 나눌 시간도 없었다.

작년에는 엄빠를 설득하지 못해서 도망을 못 갔다. 내년에는 무슨 수가 있어도 도망가야겠다고 또 다짐을 했다.   

 

그리웠고, 다시 만나 행복하다

1년 사이에 달라진 것들이 있었지만 여전한 것들이 더 많았다. 한국에는 여전히 지겹고 지긋지긋하지만 금세 그리워지는 것들로 가득하다. 

내가 없는 동안 빈자리를 가장 크게 의식한 건 나였고, 실제로 내가 가장 많이 변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는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아, 그럼에도 중국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 당분간은 한국에서 마음껏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 테다.

다대포에서 혼자 본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