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석(우시) 격리 4일차
다시 호텔 격리의 시작
공항에 도착하면 목적지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한다. 나의 경우 장쑤성 우시가 최종 목적지였기 때문에 상하이에서 3일 격리 후 다시 이동해서 우시의 격리 호텔로 옮겨가야 했다.
최종 목적지에 따라 격리 일수도 다르다. 상하이가 최종 목적지인 사람들은 3주 격리를 하지만 우시는 4주 격리다.
상하이 3일 + 우시 11일 격리가 끝나면, 2주 더 추가로 우시에서 격리를 한다. 물론 나는 자택이 없으므로 자택격리는 선택지에 없었다.
격리 호텔은 랜덤 배정이며 운이 좋으면 음식 배달도 된다던데, 나는 운마저 나빴다.
더구나 격리 기간 동안 출근을 못하니 원격으로 일을 하고, 멘토 선생님과 부동산을 통해서 집을 구해야 한다.
이 길고도 험난한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머릿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말이 되는가. 4주 격리라니. 게다가 상황에 따라 변동도 있을 수 있고. 내가 있는 지역 전체가 봉쇄가 되면 어쩌지.
상상만 했을 때는 많이 걱정했는데 의외로 막상 겪어 보니 걱정했던 것 만큼은 아니었다. 불편함은 더러 있지만 그래도 할 만은 하다.(여러 번 겪고 싶지는 않다.)
격리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니 이제는 바깥 중국 생활이 더 두려워 졌다.
안녕, 우시
상하이에 있을 땐 그곳이 상하이라는 실감이 전혀 안 났다. 늦은 밤에 이동하기도 했고, 낡은 외관의 격리 호텔과 춥고 습습한 날씨, 삭막한 풍경이 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유성화원의 촬영지 같은 느낌은 전혀 아니었어ㅜ)
호텔 이동하는 당일, 새벽 6시부터 부지런히 짐을 방문 앞에 내놓고 안내에 따라 버스를 타고 이동하니 중간 집결지인 쿤산에 도착했다.
다시 목적지에 따라서 사람들이 분류되고, 우시가 최종 목적지인 사람들끼리 대기 장소에 모여서 한참을 기다렸다.
3시간 정도 대기했는데 바깥 날씨도 춥고 공기가 통하도록 열어 논 실내도 무지 추웠다. 서울의 겨울마냥 꽁꽁 싸매고 갔는데도 오들오들 떨었다. 친구가 급히 챙겨준 핫팩이 큰 도움이 됐다.
버스에 올라 우시의 풍경을 창밖으로 감상하다가 신오구 쪽으로 진입했을 땐 긴장되고 설렜다. 드디어 호텔 같은 곳에 가는 것인가.
이곳도 외관이 낡긴 마찬가지였지만 (어째 격리 숙소들은 죄다 하나같이 데스크와 계단, 엘리베이터가 공사중인 것처럼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일까) 내부는 넓고 확실히 더 쾌적했다.
도시 경관이 한 눈에 보이는 시티 뷰라서 탁 트인 풍경이 특히 맘에 들었다.
격리 일수가 긴 만큼 기본 격리 물품(세면도구, 물, 실내화 등)도 수북하게 쌓여있고 TV를 켜니 나오는 채널도 많고 VOD서비스도 무료라서 내가 좋아하는 중드를 자유롭게 볼 수도 있었다.(물론 못 알아들음)
캐리어를 비롯해서 내 옷과 짐들에 온통 소독약을 뿌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짐을 풀고 밥을 먹고 나니 피로가 밀려왔다. 자고 일어나니 새벽 3시였다.
저녁도 거르고 까무룩 잠이 든 것이지만, 어쩐지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 하고서 다시 잠을 청한 나는 조식이 올 무렵에 눈을 떴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시간이 잠깐 멈췄다. 황망하고, 혼란스럽고, 속상했다.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는 이틀 전까지도 건강했는데, 폐렴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작년 여름 방학에 아부지와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갔었다. 코로나 때문에 직접 면회가 금지되어 가림막 너머로 할머니를 볼 수 있었지만 시력을 잃은 할머니는 나를 볼 수 없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계속 아부지의 이름과 내 이름을 목 놓아 부르셨다.
이번 설에는 찾아 뵙지도 못했다. 그저 전화로 건강하단 안부만 전해 듣고 안심했었다.
중국에 가기 전 아주 어렴풋이 걱정했던 일이었지만 내가 격리되자마자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쳐올 줄은 몰랐다.
식장에 가지 않아도 할머니의 명복을 빌 순 있지만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불안하고 황망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마음 편히 세상을 떠나셨을까. 엄마 아부지는 괜찮을까. 내가 곁에 없어서 더 힘들지는 않을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뭔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뒤에는 학교에 장례화환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아버지 지인들에게 보낼 문자 메시지를 만들고, 동생의 입국 절차와 격리 면제와 관련된 일을 도왔다.
그리고 할머니가 좋은 곳에 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바쁜 와중에도 계속 나를 걱정하며 전화를 걸어준 엄마와 나를 위로해준 친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영상통화로 장례식장에 와 있는 친척들을 보니 크게 안심이 됐다. 가족이 많은 건 이럴 때 다행스러운 거구나.
코로나 확진자의 증가로 원격수업의 가능성이 제시됐고, 우시의 일부 지역이 잠깐 봉쇄되었다 풀렸다. 오늘 오전에는 내가 탔던 비행기에 한국인 확진자가 생겼다는 소식도 접했다.
매일 크고 작은 일들이 내가 격리된 방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제는 친구들과 줌으로 만나 밥을 먹으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힘들고 즐겁고 슬프고 또 행복하다. 그걸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내겐 큰 힘이 된다.
중국에 온 뒤로 우중충한 날씨의 연속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맑은 하늘, 청명한 공기와 바람이 딱 좋은 날씨였다.
남은 격리 기간도 이렇게 무사히 잘 버틸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