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구 2021. 10. 23. 18:49

달갑지 않은 결혼식 소식들, 지회 사람들과 첫만남 술자리,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임, 부산서 올라온 친구와 집에서 밤샘 술파티까지.

몰아쳤던 주말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과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눠 체한 상태였는데, 이제 좀 소화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 이후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이 줄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차츰 가물어오기 시작했던 터라 이젠 모임 같은 것은 다 귀찮다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연유로 막상 만나게들 되니 반갑고 새록새록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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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같지 않은 뉴비

지회의 그림책 읽기 모임에 초대받았다. 느슨한 독서 모임이라길래 선뜻 가겠다고 답했는데, 모여있던 기존의 선생님들이 깜짝 게스트였던 나를 열렬히 환호해 주었다. 

잠깐 쑥스럼을 타다가 술자리로 옮기면서부터 금세 사람들에게 편히 적응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에게 금방 익숙해졌지 싶은데. 아마 풍기는 느낌들이 제각각 다르지만 운동권 선배들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밤이 깊어지고 술잔이 비워지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열중하다가 이제 내 얘기를 할 타이밍이 됐다.

나는 대학시절 학생회를 했던 경험을 라이트하게(!) 말하려고 애썼는데. 눈치 빠른 지회장님이 나의 이런 꼼지락거림을 바로 알아챘다.

사범대라면 정통 NL계열 아니겠습니까?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나는 옛날 사람들의 고리타분한 NL과 PD 가르기 유우머를 참 좋아한다. 학교 밖에서 쉬이 들을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라서 더 반갑고 정겨웠다.

이 집단에서 나는 뉴비지만, 어쩐지 아주 오랫동안 활동가로 지내온 것 같은 인상을 풍겼나보다. 이후로도 지회끼리 모임을 할 때면 종종 만남을 이어갔다.

세상에, 좋은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언제나 나는 이렇게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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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올드함을 사랑해

밤새 술을 마셔선지 숙취에 겨우 눈을 떴다. 아침 일찍 결혼식을 갈 채비를 하면서 오늘 점심은 꼭 국물을 먹겠노라고 다짐했다.

남의 결혼식 구경은 늘 그렇듯이 '남의 일'이라서 먼 발치에서 연극보듯이 식을 관람했다.

'전통적인 성역할 거부한다'는 내용의 성혼선언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감상도 안 느껴졌다. 그저 저 선배도 결혼을 하는구나. 역시 결혼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식이 끝날 때쯤 주변을 둘러보니 죄다 아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아는 사람이었는데도 못 알아본 얼굴도 있었다. 역시 세월에 장사 없나봐.

이 결혼식 핫플이네, 싶을 정도로 지난 모임에는 볼 수 없던 사람들까지 가득했다. 여기 아니면 당췌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새삼 선배의 광활한 인맥에 놀라기도 했다.

식사를 하러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인원 제한 때문에 뿔뿔히 흩어지긴 했지만 중간에 합류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밥을 먹고 차를 두 번 마시고, 저녁까지 풀코스로 놀았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다들 명분을 내세우며 자기가 돈을 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말할 거리가 소진되었는데도, 자리를 뜨기 아쉬워서 계모임을 만들었다. 살아 있는 동안 안부나 알고 지내자. 같이 여행도 가자. 어떤 미래도 장담할 순 없지만 선뜻 제안에 응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날씨가 무지 추운 날이었다. 하지만 홀로 겪은 모진 세월이 더 추웠다.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싸워줘서. 어리고 미숙한 취급을 받는 와중에도 우리는 우리만의 공동체를 만든 경험이 있어서. 그리고 그 시간들을 다 기억해주어서. 다 고마웠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구동성으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외치던 맑철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라 픽 웃음이 났다.

올드함을 사랑하는 친구들 곁에서 영원히 늙지 않고 싶다.